윌리엄 홀먼 헌트
세상의 빛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세상이 점점 무서워진다. 더위도 무섭고 그 더위를 잊게 해주는 에어컨디셔너도 무섭다.
조금 시원하기 위하여 실외기를 통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열은 실제 열의 몇 배일 것이다.
더욱 센 더위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프레온 가스는 얼마나 사용되는가.
미세먼지 타령을 수도 없이 말하지만 결국 나로 인하여 생겨나는 먼지들이 나에게로 회귀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 환경도 무섭지만 잔인하고 독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사람의 정서를 안정시켜주는 예술도 점점 무섭고 과격해진다. 영국의 아티스트 지이크와 디노스체프먼 형제에게 기자들이 질문했다.
작품이 공격적이고 부도덕해 보이는데 경건하거나 희망적인 의미는 없는가?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작품을 만들고 나서 이건 그냥 쓰레기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입체파가 전통적인 원근법을 버리듯 야수파가 대상을 재현하는 색채의 사용을 거부하듯
도덕성 역시 과감히 버릴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원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인간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사탄의 궤계를 현대미술에서 느낀다면 지나친 노파심일까?
며칠 동안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림을 바라볼 때면 무서운 세상도 잊히고 더위 때문에 갈해진 마음도 부드러워지곤 했다.
등롱을 든 예수님을 바라보니 어릴 때 성탄절 생각도 났다.
대문 앞에 걸어두었던 지초롱은 주름 종이로 만들어서 그 안에 촛불을 담아서 불울 밝히곤 했다.
종이는 흰색이었지만 그 안에 촛불을 켜면 연한 담황색 빛으로 은은하게 밝아지며 주변을 밝히곤 했다.
새벽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엄마는 따듯한 식혜를 하거나 떡국을 끓이거나 어느 땐가는 새알팥죽 준비를 하기도 했었다. 설레는 기분으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기다리다가 어린 나는 어느 새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헌트는 1843년 <왕립 미술원>에 들어간후 존 에버렛 밀레이와 로제티를 만나
세 사람이 작업을 하며 뜻을 모아 라파엘(1483~1520)시대 이전의 미술을 부활시킴으로써
당시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한 라파엘전파를 설립한다.
헌트의 작품들은 지나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하다.
<세상의 빛>에서도 그의 꼼꼼한 손길이 엿보인다.
<세상의 빛>이란 제목은 결국 예수님을 은유한다.
그리고 등롱은 그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엿보이게 한다. 예수님의 옷이나 멀리 뒷 배경의 나무들은 우
리들이 밤에 만나는 나무의 형상 그대로이다.
예수님의 등롱 역시 겨우 주변이나 살짝 밝혀주는 온유한 빛이다.
아직 아침이 먼 새벽 일까,
나무들의 어두움으로 봐서는 깊은 밤 같기도 하다. 헌트는 자산이 생각하는 예수님.
비록 가시관을 쓰셨지만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온 마음을 다해 그렸다.
예수님 옷이 화려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서 계신 곳은 퇴락한 대문 앞이다. 그분은 대문 안의 기척에 깊은 신경을 쓰며 문을 노크하고 있다.
불행히도 저 문은 밖에서 열고 들어갈 수가 없는 문이다.
안에서 누군가 열어주어야 만이 열 수 있는 문,
시들은 잡초와 잎 다진 담쟁이 덩굴이 대문을 휘감고 있다.
삿된 시선으로 대문을 바라보면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쉬 상상하게 된다.
가난하거나 게으르거나 어쩌면 마음속 밭이 잡초인 교만한 사람이거나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그런데도 십자가에 못 박힌 자욱이 선명한 손을 들어 노크하는 예수님의 표정은 어떤가?
우수와 고뇌에 가득 찬 시선으로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보니 우리도 교회에서 전도할 때 혹 저런 모습 아니었을까,
그들의 잡초 가득한 마음을 두드리는....
노크하는 예수님을 흉내내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