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Jul 09. 2019

훈데르트 바서  

쿤스트 하우스 빈

               

 비엔나에 비엔나커피는 없어요.  짜장면이 중국에 없는 것과 비슷한 일이예요. 대신 아인슈패너 커피가 있죠. 원래 마부들이 먹는 커피였다고 해요. 말을 붙잡고 있어야 하니 한손으로 들어야 하고 흐르지 않게 휘핑크림을 얹은 거지요. 에스프레소와 비슷한 모카에 물과 설탕을 넣고 그 위에 휘핑크림, 젓지 않아야 세 가지 맛을 볼 수 있겠죠.

 비엔나는 정말 정말 예술의 도시였어요. 미술관 마다 혹은 궁전마다 그곳을 가득 채우던 수많은 작품들은 봐도 봐도 끝이 없었지요. 빈에서의 마지막 날 쿤스트하우스에 갔어요.  훈데르트 바서의 개인 박물관이고 또 디자인이 특출한 사람 정도만 입력이 되어 있었기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비엔나커피의 마지막 맛처럼 향기롭고 달콤 쌉싸래하게 너무나 매력적인 곳이었어요.

 멀리서도 알게 되요, 저기구나, 쿤스트하우스가! 기하학적인 구성과 놀라운 색채가 건물이라기보다는 마치 그림처럼 보였어요, 크기와 모양이 모두 다른 창문들, 블루와 화이트 블랙의 타일들이 곡선으로 흐르고 건물 외벽으로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어요. 물론 옥상에서도요. 1892년 지어진 가구 공장을 직접 리모델링해 자신의 예술 활동을 전시한 공간이죠. 세상에 곡선으로 이어진 복도의 바닥도 울퉁불퉁해요. 그는 직선을 부도덕하며 인간성의 상실로 여겼답니다.  푸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전시장으로 들어서기 전 뒤뜰 정원으로 나갔어요. 품이 너그러운 사람처럼 아주 아늑하고 정겨운 정원이었어요. 쨍한 햇살이 나무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이차고 정원의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작품이 되는 것 같았어요. 크고 화려한 공간이 주는 놀람과는 전혀 다른 기쁨의 탄성이 솟아 나오는 공간이라고나 할까요. 

 전시장 내의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색채와 나선이 어우러져 순식간에 매혹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선들이 주는 부드러움과 화려한 색채들의 향연이 수도 없이 펼쳐졌어요. 그에게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요. 나는 마치 부드럽게 휘어진 강을 따라 걷는 것 같기도 하고 생이라는 배를 타고 노를 젓는 것 같기도 했어요. 날카로운 대결이나 대조가 없는 대신 미묘한 우수도 있었어요.  그는 색을 조합하는 뛰어난 능력으로 자연에서 얻은 색을 대담하게 자신의 작품 속에 펼쳐 색채의 마술사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어요. 평생 자연인이던 그는 나무판이나 천을 캔버스로 사용했고 달걀 흙등 자연의 색을 스스로 만들어냈어요. 그래선지 그의 화풍을 식물적 회화법이라 칭하기도 한답니다. 식물처럼 느리고 식물처럼 자연스럽게 그리는 화법이죠. 실제로 그는 작품을 완성한 뒤  정원의 식물들 곁에 세워놓고 자연과 하모니가 되는지 살펴봤다고 해요. 그의 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죠.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 바서’라는 이름의 뜻도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100개의 강’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는 다섯 가지 피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의 피부, 옷, 집, 지구는 네 번째 피부고 ‘사회적 환경과 정체성은 다섯 번 째 피부라는, 가령 그는 자연이 아프면 우리의 피부가 아픈 걸로 해석했어요.  “당신은 자연에 들른 손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외치기도 했지요. 그러니 그는 자연을 사랑했던 작가일 뿐 아니라 철학자처럼 여겨졌어요. 

 화가이면서 건축가이기도 해서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 블루마우 리조트,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 등의 친환경적인 건축물들은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어 있답니다.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도 가봤는데 건물 앞에 모래성처럼 둥그런 길이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는 마치 동굴 속을 들어가는 것처럼 아치가 만들어져 있더군요. 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아주 작은 하우스들이었어요. 

 우리나라의 거대하고 화려한 아파트, 아름다움이나 삶의 향기보다는 <돈!>을 가득 품고 있는 건물과는 정말 격이 다른 느낌이었지요. 물론 그곳에도 건물 사이사이로 지붕위로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었지요. 집안과 건물 위에서 자라는 나무는 산소를 만들고, 주위를 고요하게 하고, 먼지를 삼키고, 기온을 조절하고, 아름다움을 선사함으로써 집세를 지불한다는 나무 세입자들의 권리와   팔이 닿는 만큼 창문과 외벽을 개조해 ‘그 안엔 자유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며 창문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던 사람,  인간의 존엄만큼 자연과의 동조를 꿈꿨던 사람, 자신이 사랑했던 나무 밑에 관 없이 묻힌 사람,  “파라다이스는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지구상에서 낙원을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 보여주고 싶다.”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부엽토를 활용해  자신만의 화장실을 만든 사람, 발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의 작품 앞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실천해 내는 그의 건물 속에서  “아름다움은 만병통치약 입니다” 말한 훈데르트 바서 바로  그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아닐까 생각 했습니다.   




   

이전 04화 턱에 손을 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