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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03. 2019

턱에 손을 괴다

〈멜랑콜리아1〉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아주 사소한 행위나 작은 생각들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 경우가 있어요. 중학교 3학년 새 학기, 아직 이른 봄이어서 교실 안은 서늘했지만 운동장에는 눈부신 봄 햇살이 가득했지요. 창밖을 무연히 바라다보다가 그 순간, 이제 내가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책상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에 손을 괴고 있었어요.

 다음해 고등학교 일학년이 되어서도 비슷한 풍경이 기억 속에 있습니다. 생각은 아주 달랐지요. 그 때 중학생들을 보면서 아이구 저 어린애들....물론 턱에 손을 괴고 있었구요.


 멜랑콜리아는 사람의 감정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멜랑콜리아를 단순히 우울증 정도로 가볍게 여기지만 어쩌면 멜랑콜리아는 예술을 있게 하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동식물과 다르게 존재하게 하는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기도 합니다.

 고대 히포크라테스의 저서에서도 멜랑콜리아는 광기 우울 검음으로 결합된 정신의 깊은 상태로 표현되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광기와 우울을 지닌 멜랑콜리커를 비범한 사람이라 칭하기도 했었지요. 

 중세의 도상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 시켜 표현했는데 팔을 괴고 있는 사투르누스가 나타납니다.

 팔을 괸 자세는 깊은 사색을 뜻하는 자세로 사투르누스의 속성이 멜랑콜리아죠.

 사투르누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입니다.

 그러니 사투르누스, 멜랑콜리커는 시간의 의미를 헤아리는,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 시간과 삶을 생각하는 거죠. 


 알프레히드 뒤러의 동판화. <멜랑콜리아1>입니다. 턱에 손을 괸 모습으로 보아서 사투르누스 일수도 있고 멜랑코리아를 의인화 했을 수도 있어요. 기괴한 표정과 꼬리를 지닌 박쥐가 멜랑콜리아라는 현수막?을 들고 날아오르고 있어요. 저 눈부신 항성은 달일까요, 환한 달빛이 바다에 가득합니다. 어쩌면 또 다른 행성일수도 있지요. 빛을 싸고 있는 무지개는 강하고 세차게 다른 세상과의 구별을 전개합니다.

 한편 그늘 쪽에 턱에 손을 괸 자세로 먼데를 바라보고 있는 한사람, 손에는 컴퍼스를 들고 있고 주변에는 공과 긴자와 대패 톱 마치등 측정하거나 건축하는데 쓰이는 물건들입니다. 권력욕을 나타내는 자물쇠와 탐욕을 보여주는 돈주머니를 차고 있는데도 이 사람은 그런 것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그저 골똘히 먼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그의 머리 위 저울은 그에게 묻겠지요, 네 삶은 공정한가, 모래시계도 묻는 듯합니다.  쏜살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잘살고 있는 거니, 종은 수도승의 고독을 빙증하고 있을까요, 마방진은 숫자가 반복되어 사용되지 않으면서 가로와 세로, 대각선의 합이 동일한 배열을 말하는데  “멜랑콜리아 I”에 그려진 마방진은 당시 처음으로 발표된 4×4 마방진이라고 합니다. 아기천사는 놀다 지쳐서 조는 것 같지요.

왼쪽 중간쯤의 다면체는....생각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발치 아래의 개는 뼈가 등으로 솟아나 보입니다. 원래는 충직함을 의미하지만 저 지친모습은 이 작품이 지닌 우울과 비애를 더해주는 듯합니다. 

 예술 전반에 걸쳐 수많은 영향을 끼친 알프레드 뒤러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는 알 수 없다. 오직 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라고 고백했어요.

뒤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며 종교적인 신실함을 가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신비하고 아름답고 보이는 세상의 존재들에 대해 또 다른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멜랑코리아1은 많은 사람들에게 숱한 상상을 제공해주는 작품입니다. 여전히 수학계에서는 이 다면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더군요. 턱을 괸자를  여성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날개에 대한 해석도 분분합니다. 고뇌하는 예술가의 초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날개 달린 저사람 뒤러 자신일수도 있겠네요.  왜 문학은 깊은 우울 속에서만 솟아나는 것인가? 라는 어느 시인의 탄식도 생각납니다. 문학이 삶으로 들어서는 것이라면  우울은 그 어떤 밝음보다 삶의 근원에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생각하는 이에게 삶은 장조보다는 단조일거예요, 

 그대는 멜랑콜리커 이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천재의 길에 들어서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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