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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29. 2020

슬픔의 노래

헨릭 고레츠키


아침에 글을 쓰거나 읽을 때면 클래식을 듣는다.

방문을 꼭 닫고 조금 크게 해서 듣는다. 

오디오는 버렸지만 오래 살고 있는 스피커의 소리는 괜찮다. 

그 스피커에 핸드폰, 컴, 티비를 아들래미가 연결해주었다. 

이즈음 듣는 음악은 주로 베토벤의 장엄미사다.

클래식은 깊어서 스쳐 지나가버리니까, 나름 자유가 있다. 음악은 음악대로 나는 나대로, 

그러니 생각할 때는 아주 좋은 백뮤직이다.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책을 읽다가 

정신병에 걸린 니체를 칠 년이나 그 어머니가 돌봤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이 태양이었던 어머니의 칠 년, 그리고 지금도 철학 하면 떠오르는 위대한 인물의 말년이 그랬구나. 

그가 중얼거렸다던 <미친 사람>의 말ㅡ 

결국 죽었어, 나는 머리카락을 심지 않아ㅡ 이 너무 슬펐기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헨릭 고레츠키의 ‘슬픔의 노래’를 떠올렸다. 


아주 작은 소리로 음악은 시작된다. 슬픔이 몸에서 배어 나오듯이,

오분 정도 거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이 세상 가장 큰 슬픔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이 아닐까, 

콘트라바스가 거의 들리지 않게 슬픔에 대해서 말한다.

스트링도 아주 작게 피아니시시모로  흐느끼듯이 공감하고.....

오분 정도 작은 음악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생의 한 단면이 바스라지듯 툭 떨어진다. 


현들의 소리가 조금씩 커지지만, 

여전히 절제……. 소리죽인 신음을 토해내듯, 

원망이 가득 차 있지만 원망조차 할수 없는 흐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콘트라바스처럼 여인이 노래하기 시작한다. 

아주 느리게. 처절하게 현들은 이제 그녀의 목소리 뒤로 숨는다. 

고통스런 얼굴을 가린 채 뒤돌아서 흐느끼는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대한 토로라기 보다는 절규이자 기도다. 

누구던가, 홀로 코스트를 겪은 후 시를 쓸 수는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폴란드 티비에서 녹화한 유투브로 '슬픔의 노래'를 듣는데  

검은 옷을 입은  소프라노 가수와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지휘자의 악보를  비춰주는 사이 

나이든 한 남자가 자주 잡힌다. 

음악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얼굴이 슬픔을 아는 얼굴 같다.  

슬픔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의 슬픔을, 삶의 슬픔을, 세상의  슬픔을 느끼고 있는, 

나이와 세월이  자연스레 그려주는 슬픔이라고나 할까,

물론 음악이 끝난 뒤  그는 유쾌한  농담을 하거나 연주에 대한 감흥을  목소리 톤을 높여서 이야기 할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자신의 얼굴 분위기와는 아주 상이할수도 있다.

아 고레츠키는 폴란드 사람이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도 홀로코스트에서 죽어갔다.  


어제 지인들과 식사를 하고 호수공원에 있는 책 카페로 갔다. 

소나기가 오락가락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림을 그리는 분이 그랬다. 

무엇을 해도 허망하다고, 아이가 없어서 그런것 같다고 

무엇을 한들 허망하지 않은 게 있을까,

나도 가끔 테이프를 되감듯 인생의 뒤로 돌아가 보는데 아쉬운 지점에서 다른 길을 갔다 한들 

뭬 그리 달라졌을까,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한다 한들 그게 또 우리네 삶에 무슨 대단한 일이 될까, 

쓸쓸한 생각이지만 

서 있는 자리에서 여전히 어제처럼 그렇게 오늘을,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갈 수밖에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이 스치운다> 

윤동주가 서시를 이십대에 썼는데 아니 그 친구는 그 젊은 나이에 

육십 대의 회한을 알았다는 말인가, 

 그러네, 

그의 생은 짧은게 아니라 농축된거네,

29살을 살았지만 그는 나보다 더 길게 살았네.

그러나, 

그래도 스물아홉 살은 너무 빛나는 젊음 아닌가,


자주 웃고 자주 떠들며 사소한 수다와 사소한 상념에 빠져서 잊고 살지만

결국 삶은 슬픈 것이다.  


사족:

부엌일 할 때는 가끔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나 ‘비와 당신’ 그리고 잔나비의 노래를 듣기도 한다.

이런 유행가들을 잘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연습을 해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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