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티소
<시월> 1877 제임스 티소(jamesTissot 1836-1902)
올해 가을은 유별나게 성큼 다가왔다. 지나가던 과객인 태풍이 품고 온 가을만 남겨두고 홀홀이 떠난 탓이다. 어쩌면 지루할 정도로 자주 내리던 비가 가을을 데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름 장마도 길었지만, 여름이 끝나가는데도 비는 자주 내렸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의 쌀이 준다는 옛말을 생각하며 걱정이 되었는데 신기하게 그 빗속에서도 벼는 누렇게 익어갔다. 햇살 때문에 벼가 익는 것이 아니라 시간 때문에 익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요한 생들은 다 죽음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다녀올 수 있으면 죽음이란 얼마나 향기로운 여행이냐/삭제된 악보같이 낙엽이 진다/이미 죽음을 알아버린 나뭇잎이 내 구두를 덮는다> 이기철 시인의 ‘시월’이란 시의 일부다. 고요한 생들이 다 죽음 쪽으로 기울인다는 구절의 품이 크다. 지나치게 로맨틱한 느낌이 있지만, 무엇에든 약간은 지나쳐도 좋을 시간이 시월이 아닐까,
제임스 티소가 그린 <시월> 이란 작품이다. 마로니에 나무가 얼마나 큰지 가지들이 마치 숲처럼 내려앉았다. 실제 유럽 여행을 할 때 보니 정말 곳곳에 마로니에가 많았다. 가로수는 지천이었고 낯선 집들의 정원, 공원에서는 아름드리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 그때가 오월이라선지 큰 키만큼 커다란 원추형 꽃이 만발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시 칠엽수나 서양 칠엽수로 불리는데 이파리는 더욱 아름다운 나무다. 동숭동 시절의 서울대학교 나무로 유명했는데 필자에겐 박건의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첫줄 가사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가 저절로 연상되는 나무이다.
저 아름다운 여인은 작가 ‘제임스 티소’의 연인 ‘캐슬린 뉴튼’이다 주름 가득 덮인 짙은 보라색? 치마 사이로 살짝 보이는 레이스 속치마는 섬세해 보이고 거의 검은색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무늬의 윗옷 사이로도 레이스 브라우스가 보인다. 모자까지 거의 완벽해 보이는 차림이다. (미모의 아일랜드 아가씨를 만난 티소는 그녀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데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뉴튼의 상반신을 그린 <내사랑>은 <시월>과 같은 옷이다)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은 화려하고 찬란해서 가을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절정은 이미 저뭄을 가득 담고 있다. 벌써 떨어진 낙엽들은 가득하고 나무 위 잎들도 습기를 잃고 있다. 그렇다면 저 젊은 여인만 싱싱한가, 누군가는 유혹하는 눈빛이라고 했지만, 깊이 보면 성장한 차림과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 선듯한 콧날과 커다란 눈망울의 아름다움을 꼭 다문 입술로 누르며 아무것도 중요치 않아, 선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그녀를 부른 듯 뒤를 바라보는데(혹시 그녀의 지나온 시간이 부른 걸까?) 아무것도 아니었어, 뭐 별것 없었는데 왜 자꾸 부르는 거죠?
그녀의 팔 사이에 껴있는 낡은 책 한 권이 상념을 일으킨다. 성장한 옷과는 다르게 많이 낡은 책이다. 수많은 손길로 인해 종이는 부풀어 올랐고 위아래가 접혀 금방 찢어질 것처럼도 보인다. 무슨 책일까? 시집일까? 소설? 가을에는 철학을 읽으라고 했으니 에세이 일수도 있으리. 가까이 두고 자주 펼쳐보는 책이 틀림없다. 1879년 작 <책 읽어줄게> 라는 작품에서도 책과 마로니에가 등장하는데.... 사람에게 받을 수 없었던 위로를 저 책에서 받았을지도 모른다.
제임스 티소ㅡ제임스는 영국식 이름이고 티소는 프랑스 이름이다. 프랑스 출신이던 티소는 프로이센 전쟁과 파리코뮌에 가담했던 후유증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온다. 영국을 좋아해서 이름도 영국식으로 바꿨다.
드가와 절친이었던 그는 드가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인상파에 합류하지 않았다. 색채는 화려했고 묘사는 섬세해서 당대 최고의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영국의 평론가로부터는 혹평을 받았다.
그는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었지만 두 아이를 둔 이혼녀인 뉴튼과의 동거 생활 때문에
영국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게 된다.
뉴튼은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는데 남편의 아이가 아니어서 이혼을 당하게 된다.
그 시대 정부를 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혼녀와의 동거 생활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더군다나 그런 모델을 화폭에 그린다는 것은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조차 모욕적인 상황으로 여긴 탓이다.
그럼에도 티소는 굴하지 않고 뉴튼을 모델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린다.
티소는 자신의 생애 중 뉴튼과의 생활을 가장 행복한 시절로 여겼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생활도 뉴튼의 결핵으로 인해 서서히 저물고
결국 아편 과다 복용 자살로 그녀의 삶은 마무리 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티소는 뉴튼을 모델로 한 그림을 많이 그린다.
특히 1883년에 그린 <공원벤치>는 뉴튼에 대한 티소의 사랑이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녀를 잊지 못한 티소는 견디다 못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 후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종교화를 많이 그리게 된다.
원래 나뭇잎은 초록뿐 아니라 노랑 붉은색을 다 지니고 있다.
추워지면 엽록소가 그 기능을 못 해서 다른 색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나뭇잎들은 색으로 삶을 건넌다.
어쩌면 이즈음 그들의 그윽한 번짐은 가장 내밀한 부분일 것이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은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홀로 가야만 하는 ‘저뭄’ 탓이다.
가을은 사라짐으로 손을 모으게 하고 머물지 않음으로 마음을 살피게 한다.
<시월>은 아름답고 로맨틱한 가을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라지는 것들ㅡ 젊음이나 생명이나 계절이나 시간ㅡ을 바라보게 한다.
<시월>속 그녀는 저 눈부시게 단풍든 마로니에 잎이 만들어주는 경계의 세상에서 뒤돌아본다.
그녀는 누구를 바라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