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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01. 2020

12월

사색

 이상하게 꽃말이나 전설에는 흥미가 없다. 꽃은 순전한 자태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게 하는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유도 설명도 필요치 않은 아름다운 존재. 거기에 향기가 더해지면 그저 혼잣말처럼 아, 신음을 토해내고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格은 나무 목에 가지 각이 합해진 단어다. 나무의 거리가 주는 것이 격이라는 뜻도 된다. 인간의 격을 생각하게 하는 단어다. 유토피아인들이 여섯 시간의 노동 뒤에 한가로움과 사색에 몰두했다는 것은 참으로 격 있는 삶이 아닌가, 


 나무나 꽃을 보고 가슴이 뛰는 것은 그냥 우연히 생겨나는 감정은 아니다. 내 경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식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 감정을 스쳐 가지 않게 내 품으로 안았다. 그를 생각하고 그의 이름을 외우고 그 생명이 지닌 의미를 반추했다. 그가 내 안에 일으킨 파고에 대해서도 그리고 기억에 대해서도 사유했다, 도서관에서도 그에 관한 책을 꽤 많이 빌려 읽었다. 나무나 꽃, 풀을 응시하고 시선 속에 담고 그들이 주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되새김질하는 것, 그런 짓(?)을 아주 많이 한 뒤 내 안에서 그들을 향한 아주 자그마한 새싹이 나오고 자라기 시작했다. 식물에 대한 사색은 삶의 결을 바꿔준다. 내 삶을 객관화시켜주는 친절한 선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최고의 행복은 가장 아름다운 것 곁에서 사색에 잠겨있을 때라고,


 가령 우리의 마음을 정원이라 치면 그 안에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키울 수는 없다. 내게 허락된 평수와 땅의 지질과 온도에 맞춰 알맞은 종류를 선별하고 심고 키워야 할 것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거나 지닐 수 없는 것을 원하게 되면 그 정원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내 정원과 남의 정원을 비교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키울 수 없는 것들은 차경借耕만으로도 충분하다. 


 목서는 늘푸른나무이며 대관목이다. 관목은 키 작은 나무를 말하는데 오래된 목서는 제법 키가 커서 대관목이라 칭한 듯싶다. 어느 동네에서는 만리향으로 부르기도 한다. 꽃이 귀한 늦가을에 피어나 사랑채에 많이 심어 선비목이라 부르기도 했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성품이다. 그래서 중부지방에서는 만나기 어렵다. 지난번 제주 여행 때 다섯 번쯤 목서를 만났다. 목서로 인하여 여행은 풍성해졌다. 특별히 서귀포에서 만난 목서들은 만발한 꽃을 거느리고 있었다. 어두운 내 안을 밝히는 불빛 같았다. 둥그런 자태로 환한 꽃 가득 매단 그대로 등롱! 그 향기는 잊고 있던 설렘을 주었다. 내가 지니고 있지 않아서 더욱 아련한, 이것이 바로 차경이다. 


 100%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누구하고도 경쟁하고 싶지 않다. (사실 식물들도 깊이 들어가면 경쟁이 아주 없지는 않다) 치열하게 살아오지 않는 대신 얻어진 자유로움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언제나 앞자리보다는 뒤가 더 편하다. 많이 모인 자리보다는 작은 모임이 더 즐겁다. 그리고 내 이야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 한다. 부자는 정말 아닌데 그도 괜찮다.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못하였다. 눅12:27> 예수님은 식물의 근원을 갈파하셨다. 꽃 한 송이로 우리의 나아갈 길까지 예표 해주셨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인디언들은 ‘다른 세상의 달’이라고 12월을 불렀다. 마지막이 언제나 새로운 시작과 함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하다.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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