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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19. 2022

진달래는 이름도 많아

 



아무래도 진달래는 시집갈 날 다가오는 설레는 아기씨 꽃 같다.
연분홍 꽃잎은 발그레 상기된 아기씨 볼이 분명하고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 미려하게 다가오는 옅은 향기 역시 때 묻지 않는 아기씨 향기라.
해가 설핏 기울 무렵 길쭉한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진달래를 보라.
 마치 습자지처럼 얇고 투명한 분홍 살이 얼마나 곱고 여린지
 부엌 설거지물에 아직 손담그지 않은 아기씨 살빛 아닌가,
 진달래 자태 역시 아기씨다.
 고개를 꼿꼿하게 세울 줄 모른다.
 분홍 옷고름 입에 문 아기씨처럼 얼굴 반쯤 가린 채 피어 난다.
 배시시 옆으로 고개 돌리며 피어 난다.
 
 삼월 삼짇날 화전놀이를 갈 때면 남자들은 땔감과 솥을 가져다가 산자락에 설치해주고
 돌아온다. 여인들은 빛이 잘 드는 산자락에 곱게 피어난 진달래를 치마폭에 따서
 반죽한 찹쌀가루를 기름에 지져낸 뒤 그 위에 곱게 얹는다.
 전병을 먹는가,
 아니다. 그때 여인들은 꽃을 먹는다.
 꽃을 먹으며 꽃이 된다.
 꽃 같던 젊음을 기억해 낼 수도 있겠지.
 꽃처럼 사랑받았던 어린 시절 때문에 혼자 속으로 울컥할 수도 있다.
 혹은 꽃처럼 고왔던 새색시 얼굴을 담았던 색경 ㅡ 이 깨지던 순간을 생각할지도,
 불어오는 바람은 똑같을 텐데 진달래를 거쳐 다가오는 산바람은
 추억의 불씨처럼 마음을 서럽게도 하고 기쁘게도 한다.
 훠이, 훠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화전을 먹으면서 다독인다.
 
 남자는 어떠할까?
 집안의 가구가 되어가던 아내가 옷을 차려입고 사람 가운데 서니 낯선 타인 같다.
 멀리 아내의 등위로 연한 분홍빛 꽃망울이 어른거리니
 문득 고왔던 첫 모습이 기억난다.
 뒤 안으로 돌아가는 치마 자락만 봐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밤이면 어떠했던가,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그쳐지고 밤 세숫물 소리
 그리고 자박 거리는 발자국 소리.
 마루를 지나 방문 손잡이가 조심스럽게 들려지는 순간,
 가슴속 숨이 멈췄던가,
 그런 아내가 사방탁자가 되어가고 쌀뒤주가 되어가고 어느 때부턴지지
 있는 듯 없는 듯 해졌다.
 진달래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은 남자의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를 일궈낸다.
 삼월 삼짇날 밤 오랜만에 안은 아내의 몸에서 진달래 향기가 난다’     


****

참꽃에 볼때기 덴년'이란 속담이 있다. 

아련한 아지랑이 사이로 피어나는 연분홍빛 참꽃이 

그만큼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젊은 처자의 볼에 불을 지폈다는 뜻, 

설마 볼에만 불을 지폈을까, 가슴에는 더 화안 하게 타오르는 불빛이 있었겠지, 

아마도 연분홍빛 볼을 지닌 젊은 아이에게 향하는 심통 어린 중년의 언어 같기도 하다. 

중년 아지매의 가슴이라 할지라도 불꽃 없을까만 솟아나는 젊음의 분홍빛에 어이 견주리, 

그래서 저리 질투 어린 표현을 한 게지. 

그러나 또 가만히 그 이음새를 보면 그 짧고도 삿된 표현에 복사꽃 같은 정감이 그득하다. 

미운 듯 거친 말을 해대면서도 그래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너의 분홍빛 볼은 참으로 아름답고나. 

그러나 얘야, 그 아름다움 또한 무참할 정도로 사라져 간단다. 

그러니 더욱 저 참꽃처럼 하르르 아름다우렴. 

부러움과 체념, 속절없이 져가는 인생을 관조하는 너그러운 문장 같기도 하다. 
  

 참꽃에 볼을 덴 젊은이들이 진달래를 꺾어 들고 가 무덤에 놓아주는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진달래 꽃무덤 두견총은 장가 못 가고 죽은 총각이나 객사한 소금장수의 무덤을 일컬음인데... 

총각 무덤에는 처녀가 처녀 무덤에는 총각이 놓아주었다고 한다. 

몽달귀신의 해코지가 미치지 않는다는 해석보다는 

하마 아리따운 처자나 건강한 총각들이 두견화 꺾어 바치면 오래된 죽음이라도 위로가 되었을까, 

젊은이 역시 인생의 종착역인 쓸쓸한 무덤 앞에 서면 

무르익어가는 봄이 주는 달뜬 마음 안정시켜 주기도 하려니,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황폐해진 무덤 앞에서 삶과 주검을 생각하다가 

무상한 인생살이 속에서 못 가진 자를 기억할 수도 있으리.
 발랄한 봄의 상상력으로 본다면 참꽃 핀 길 지나 

무덤 찾아가는 길에 

그리운 님을 만날지도 모르겠네, 

눈부신 봄날 어느 젊음인들 아름답지 않으랴. 

경상도에서는 진달래나무숲에 꽃 귀신이 산다고 하여 어린이들을 산에 가지 못하게 했다. 

진달래나무 숲의 꽃 귀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참 서정적이기도 하지. 

분명 그 속내는 자장 궂은 아이들 불놀이라도 할까 봐서 그랬을 것이다.  


  갓 삼십 되었을 때  파주 파평면에서 몇 년 살았다. 

동네에 홀로 사는 여인과 아들이 있었다. 

드문드문 교회를 나오던 여인인데 갑자기 중풍으로 눕게 되었다. 

교회 집사님들과 그분을 돕기 시작했다. 

집안 청소와 목욕을 시켜주고 먹고 싶은 음식과 이불을 빠는 일등, 

그 집 방안에 들어서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불을 빨려고 들고 나오는 동안에는 아예 숨을 쉬지 않았다. 

재래식 화장실 냄새는 양반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심하게 말하면 결벽증 환자 비슷한 그 시절의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나 할까, 

냄새와 이불, 여인의 몸을 다 기억하면서도 밥이 잘 넘어가던 것, 

그 일 이후로 비위가 상당히 강해지는 은혜로운 역사(?)가 생겨났다. 

그 여인이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혼이 떠난 물체의 몸을 난생처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몸. 

고요의 실체를 본 것 같았다. 

돌봐줄 친척도 없어서 면사무소와 교회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녀도 경운기에 실리고 나도 그녀처럼 경운기에 흔들거리며 산골짝 골짝으로 들어가는데 

그날 햇살은 어쩌면 그렇게 눈부셨을까, 

가는 길 내내 분홍빛 진달래가 온산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는데  

진달래의 또 다른 이름 ‘만산 홍(萬山紅)’이었다.

 진달래는 이름도 많다. 

형제의 전설이 어려 있는 두견화를 비롯해 

물가에 피어나서 수달래, 앳된 낭자를 연달래 성숙한 처녀는 진달래, 

그리고 과년한 노처녀는 난달래라고 불렀다. 

며칠 전 양주 미술관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묵은 길옆의 나지막한 산들이 온통 만산홍이었다. 

사라져 버린 내 젊음 속에서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만 사라진 게 아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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