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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03. 2022

수수꽃다리

라일락


수수꽃다리는 꽃보다 향기로 존재를 알린다.

건륭제의 愛妃였던 향비는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나 이름조차 향비가 되었다는 글을 읽었다.

어여쁘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겠지, 고개를 저었는데 정말일 수도 있겠지. 꽃 앞에 서면 마음이 연해진다


수수꽃다리는 젊음의 꽃이다. 총상화서의 모습은 상큼하고 향기는 발랄하다.

연보랏빛이나 흰빛은 둘 다 이제 막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하는 절묘한 챈스의 빛깔이다.

어느 영국 아가씨가 믿고 사랑하던 남자에게 순결을 짓밟혔다.

아가씨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친구가 아가씨의 묘에 산더미처럼 수수꽃다리를 꺾어 바쳤다.

수수꽃다리는 보랏빛이었는데 이튿날 아침 꽃잎이 모두 순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수수꽃다리는 지금도 하트포드셔라는 마을에 있는 교회 묘지에 계속 피고 있다고 한다.

친구의 묘지 앞에 향기 가득한 수수꽃다리를 놓으며 슬프기만 했을까?

무덤을 꽃으로 싸안던 아가씨의 마음에는 슬픔 못지않게 친구의 남자를 향한 증오도 가득하지 않았을까,

자살로 인생을 끝막음한 벗을 바라보며 처음 다가온 삶의 회한에 몸을 떨지 않았을까,

죽음을 처음으로 직시한 눈부신 봄날, 신록의 잎은 한 해중 가장 아름다울 때이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벗은 아름다웠다. 죽음과 신록, 죽음과 꽃, 극과 극이 주는 간극 속의 허무.

프랑스에서는 하얀 수수꽃다리는 청춘의 상징으로 젊은 아가씨 이외에는

몸에 지니지 않는 게 좋다는 묵계가 있었다고 한다.


흰빛, 연보랏빛, 수수꽃다리의 색은 순결하다. 꽃 옆에 서서 향기를 들이킨다.

향기가 몸에 배면 얼마나 좋을까, 할 수 없으니 서양에서는 향수를 만들고

우리나라 옛 여인들도 수수꽃다리 꽃봉오리를 따서 그늘에 말려 향낭이나 향갑에 넣어 몸에 지니기도 했다.


수수꽃다리 여린 잎은 지나가 버린 첫사랑의 맛이라는 설도 있다.

올봄 처음으로 연둣빛 수수꽃다리 잎을 하나 따서 입에 넣어보았다. 연한 생김새와 부드러운 빛깔과는 너무나 다른 쓴맛,

첫사랑의 맛이 이다지도 쓸까,

저 싱그러운 향기를 지닌 나뭇잎이 이렇게 고약하다니,

꽃의 향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쓰디쓴 인생은 잎처럼 계속된다는 속 깊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잔인한 땅에서 수수꽃다리 피어난다고 엘리웃은 '황무지'를 써서 에즈라 파운드에게 헌정했다.

첫 장의 제목은 죽은 자의 매장이다.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 황무지ㅡ 그의 황무지는 현실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겪은 전쟁 후의 상황은 잔인했을 것이다.

시를 쓰지 못하고 대신 돈을 만지며 살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겠다.

황무지는 죽음의 굴레를 머리에 두른 人間事이든지 

문명에 질식해가는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 인간의 자화상이다.

그래선지 내 이십 대의 황무지는 봄을 음해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수수꽃다리 이파리 따서 입에 물어보듯이 이 봄 황무지를 다시 읽었다.

슬픔과 고독, 욕망과 죽음, 죽어버린 사람들과 다시 죽음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목소리만 남은 작은 시빌은 복이라고 여겼던 욕망 속에 숨겨진 저주를 보게 한다.

그래도 결국은 삶에 관한 이야기.


노란 개나리도 선명한 분홍빛의 철쭉도 아닌 순결의 빛,

가장 봄스러운 꽃이 수수꽃다리라고 엘리웃도 여겼음이 틀림없다.

수수꽃다리보다 더 일찍 피어난 꽃들은 그저 봄의 전령사일 뿐 

진짜 봄은 수수꽃다리로부터 시작된다는,

그러나 그 시작점이 바로 봄의 끝이기도 하니

수수꽃다리는 삶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고나 할까,


만개한 봄이다.

그러나 봄은 금방 사라질 것이다. 수수꽃다리 피었으므로.


             *수수꽃다리는 물푸레나뭇과에 속하는 낙엽성 관목으로 한국산 라일락


            

사진은 몇년 전 북한산 숨은벽에서 찍은 개회나무 정향나무 

외국인이 북한산 정향나무를 수출해서 미

스킴 라일락을 만들어 

다시 우리나라에 미스킴 라일락이 퍼졌다.

그러니 미스킴 라일락의 원조 할머니.북한산 사모바위에는 보랏빛 정향나무가 여러그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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