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순절입니다.
가을의 다른 이름,
초가을이 살짝 지나 흰 이슬이 맺히는 시절,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방안공기와 다른 서늘한 기운이 다가올 때,
손이 건조해져서 나도 모르게 겸손한 모습으로 두 손을 맞잡을 때.
숲의 그늘이 확연히 짙어질 때,
아, 매미 소리가 그쳤네, 문득 통각을 지닌 느낌이 서늘하게 다가올 때,
이상하죠. 오래전부터 염하의 삶을 사는 매미의 등장에서 가을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포도순절은 한 해 중 가장 서정적인 시절입니다.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중략)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서역이라니//김경미
그래선지 저 시인도 말하네요.
실물은 헛된 것이니,
서로 편지나, 가끔 편지나 보내자구요.
대마도에 갔을 때 신사에서 본 소나무 한그루가 잊히질 않습니다.
신사 바로 앞이 바다라 밀물 때는 바닷물이 산사까지 들이찬다는군요.
그러니 소나무 뿌리가 온통 뒤로만....
저 뒤 숲으로만 향해 있더군요.
뿌리는 굵고 단단하게, 검은 활기를 지닌 채 삶의 방향을 숲으로 정한 듯 보였습니다.
나도 저렇게 곡진한 모습으로 주를 향하고 있는지 묻게 되는 순간이었죠.
한때 북한산을 내 연인으로 삼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좋고 그의 품에 안기면 세상이 내 것 같아 더는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 자체로 거의 완벽한 충만의 상태라고나 할까요.
산 입구의 거님길을 지나 들머리를 넘어 사람없는 호젓한 산길로 들어서면
저절로 커다란 숨이 쉬어지곤 했어요.
내가 쉬는 숨이 아니라 산이, 산의 기운으로, 내게 일으킨 산의 호흡이라고나 할까요.
그의 품을 걷노라면 지극히 정적인 상태가 도래하여 생의 철학이 사방 데서 다가와 체화되기도 했었죠.
가령 가을이 깊어갈 무렵 홀로 산을 걷는데 커다란 소리가 나서 흠칫 놀랍니다.
자그마한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였어요.
그 작은 것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소리.
크고 작은 개념이란 게 얼마나 절대적이며 혹은 사소한 것인가,
사위가 적막한 탓이기도 했을 것이고
나의 고요한 마음이 받아들인 거대함의 변용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도토리는 과연 지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떨어지며 도약하는 것인가,
그 순간 사념은 전도서까지 다다르기도 하지요.
도토리를 지게 하는 저 바람은 과연 어디서부터 불어오는 것인가,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저 도토리와 나는 무에 그리 다를 것인가,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미미한 존재라는 절절함이 사무치게 다가오곤 하지요.
대마도에서 엄청나게 크고 오래된 수백 년의 세월을 보낸 녹나무를 보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안을 자꾸만 비워서라고 하더군요.
실제 그 오래된 녹나무들은 정말 구멍이 많았어요.
어느 나무는 나무속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보니 저 위 하늘이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식물학적으로 맞든 안 맞든 비움에 응시를 했었는데 가을 북한산, 한 알 도토리에서 비움이 있더군요.
어제는 은꿩의다리를 찾아 읽고/오늘은 금꿩의다리를 찾아 읽네/야생의 풀꽃 경經에 빠지다보면....,
어느 눈 밝은 시인은 풀꽃에서 경을 찾아 읽어냅니다.
그의 눈을 살짝 빌려 내 눈으로 한다면
살짝, 아주 살짝. 삶이 가벼워져 우리를 쥐락펴락하는 세상일에서
아주아주 살짝, 놓여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삶이 지극히 소소해지는 순간이죠.
그래서 삶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당당해지고
그래서 자연스레 죽음을 생각하고 바라보게 되는 것,
자연이 주는 위로이자 깨달음입니다.
편지가 지닌 가장 좋은 장점은
언제나 할 수 있는, 누구와도 할 수 있는, 일방통행이지만 아무에게도 상처가 없는 길입니다.
나뭇잎 점점 가벼워져 가고(혹 초록색은 생명의 무게를 지닌 것일까요?)
여름엔 전혀 들리지 않던 나뭇잎들끼리 부딪히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시간의 실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절,
포도순절입니다.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