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단톡방에 자그마한 무지개 사진이 짤막한 글과 함께 실렸다.
아침 햇살에 의해 거실에 무지개가 생겼다는 것,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예가 있었다.
카톡에 무지개 사진이 올라왔다.
동그란 형태에 영롱한 무지개가 가득 차 있었다.
사진을 보내신 분은 그림을 좋아하신 분이라선지 처음 보는 장면이라며 무척 신기해하셨다.
색채와 혹은 우연에 관한 생각을 엮어서 답글을 보낸 기억이 있다.
우리집 안방 화장실에도 겨울이면 아주 가끔 무지개가 현현한다.
선명하고 예쁘다.
짧은 순간이라선지 경이롭기조차 하다.
겨울, 그 어느 하루, 아주 짧은 시간, 빛이 우리 집 창문 어딘가를 스칠 때
그 순간 굴절ㅡ파동이 서로 다른 매질(媒質)의 경계면을 지나면서
진행 방향이 바뀌는 현상ㅡ되어 ‘빛의 순간’이 생겨난다.
나만의 해석이지만 성경 속 무지개도 굴절에 의한 죽음일지 굴절로 인한 중생을 은유하는 것 이 아닐까,
파울첼란이란 유대계 시인이 있다.
그는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에서 태어나 평생 독일어로 시를 썼는데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다.
사람의 기름이 비누가 되고 동료들의 죽음을 가리기 위한 흥겨운 곡이 연주되는 곳에서 그는 시를 썼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었지만 죽음의 땅이었고 숨을 쉬고 있었지만 죽음의 연기를 호흡해야 했다.
죽음이 일상처럼 진행되는 공간에서의 시는 희망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그곳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의 시를 유리병 편지라 불렀다.
한 아이가 빵 만드는 재료를 섞는 배합기 앞에서 밤새 혼자 일을 한다.
사람들 모두 잠든 깊은 밤에 홀로 깨어 기계 앞에서 일하는 아이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번 주말의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랄까,
월급을 타서 꼭 사야 하고 써야만 할 돈들,
지난번에 봐둔 옷을 살 생각에 부풀었을지도 모른다.
가을이 깊어지면 단풍 구경을 갈까,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죽음의 땅이라고는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아우슈비츠보다 더욱 잔인한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과거의 유물인데
오늘, 대한민국, 이름도 기이한 <끼임사> 앞에서 잔혹한 아우슈비츠를 본다.
도처에 죽음이 웅크리고 있다.
가난한 근로자들은 위험한 죽음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순간적으로 기계에 빨려 들어갈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의식이 있는 동안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
반죽 배합기에는 덮개도 자동 멈춤 장치도 없었다고 한다.
아, 그 작은 것들만 있었더라면 싱싱한 생명이 그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는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죽음의 터에서 여일하게 빵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귀하게 여기거나 사랑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그 아이 떠난 자리를 잠시라도 고요하게 해서 그 어린 죽음을 기억하게 만드는 기품도 없다는 말인가,
젊은 청춘을 죽음으로 내몬 사악한 돈이 그 잠시의 시간조차 허용하지 마라!고 당신들께 명령하던가,
그 아이 장례식장에 배달된 회사의 빵은 관례라는 변명을 했지만,
무의식적인 그들의 행위는 비인간적인 그들의 속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6일 만에 SPC 그룹 회장이 사과했다.
그의 웅얼거리는 말 대신 몸으로 하는 이야기가 보였다.
‘(돈이 많아서 고상한)내가,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런 천박한 짓을 꼭 해야만 하는가,
지겨운 시간이여 어서 지나가라.’
거기 어디 마음 아픈 조의가 있었을까?
과연 부자나 재벌들은
그 어린아이가 보내는 외로운 시간 때문에
자신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린다는 생각을 눈곱만큼이라도 하는 것일까,
시를 써야만 시인이 아니다.
시를 쓰지 않아도 열심히 사는 사람의 삶에서 시의 향기가 난다.
“아이야, 빛이 굴절되어 무지개가 생겨나듯,
한순간,
네 삶이 굴절되어 들어간 다른 세상에서는
부디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이 글은 그 아이가 보낸 유리병 편지다.(교계신문 연재글)
네가 내 안에서 소멸하는것처럼
마지막 다해진
숨의 매듭에도
너는 꽃는다
파편 하나를
삶을
/네가 내안에서/ 파울 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