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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06. 2016

포도순절에 기체후 일향만강 하신지

백로時





백로(白露), 흰 이슬이 내리는 시간이 되면 밤하늘에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일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농부들은 이 번쩍이는 빛을

벼이삭이 패고 익는 빛이 낮만으로는 부족해 밤하늘도 보탠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쌀이 익어야 할 텐데 노염(老炎)으로는 풍성하지 못하여 

그리하여 밤도 애달파서  그 빛을 보탠다는 거겠지요.
명랑한 해량일까요, 구슬픈 해량일 수도 있겠습니다. 

깊은 밤 기온의 차이로 생기는 그런 작은 빛 조차 벼이삭 익는 심정에 보태는 마음이 
가을이라선지 더욱 그윽합니다. 일상적인 삶을 영위시켜 주는 매우 기능적인 쌀조차 

감성이란 옷을 입게 되는 것도 가을이란 계절 탓일 겁니다.
  

어젯밤에도 밤길 걸으며 혹여 애달픈 그 빛이 보일까 봐 내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을은 소리의 공명이 잘되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밤이 깊어갈수록 어쩌면 그렇게 풀벌레 소리들이 명랑해지는지,
불빛 환한 트랙 길을 걸으면서 문득  밤이 되면 정말 밤 같은 밤이 되는 고향집 생각이 나더군요.
새삼 마음이 적요해지며 세상 속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대학 이학년 때 자취방에 들리신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처음으로 '쓸쓸함'을 읽어 낸 것이 

아마 내가 처음 입은 '어른의 옷' 그 첫 단추가 틀림없을 겁니다. 

선걸음에 용돈을 주시고 방을 나서시는 아버지 뒤를 따라 나갔었지요.
들어가라는 아버지 손짓에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었어요.



기다란 골목길이었는데 가을 햇살은 그러잖아요. 

너무 투명하고 밝아서 모든 사물들을 눈부시게 하면서도 바로 그 곁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그 농담의 차이가 가을이 깊어갈수록 선명해지지요.
담장 위 나뭇잎 한 두 잎 너울거리며 떨어지기도 했을 거여요. 
휘적휘적 걸어가시는 아버지 등에  가을의 그늘이  출렁거리고 있었어요.  

아버지~ 가 사람으로... 타인으로 여겨지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 때문에 아, 아버지도 사람이시구나. 이제 늙어가시는구나.... 생각했던 거지요.

생각해보면 그때 아버지 나이가 지금의 저보다 더 젊으셨어요.  

그러니 그다지 늙으신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엄마 없이 쓸쓸한 인생도 아니셨고
직장에 다니시면서 벗들과 흔쾌한 생활을 하실 때였는데
아버지의 쓸쓸함은 도대체 아버지 어디에 숨어 있다가 
그렇게 슬쩍 아버지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한 번도 자신의 뒷모습을 직시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일진대 뒤를 볼 수 없는 단순한 현상은 

많은 은유를 거느리는 듯도 합니다.

실제적인 자신의 등 외에도 자신이라서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각지대와 객관성을 결여한 시각,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하의 몽매 등

그래서 존재의 심원처라고도 할 수 있는 '쓸쓸함'은
나이 든 사람의 등 뒤에서 

그것도 깊은 가을에 그렇게 슬며시 나타나는지도요.  

아침에만 흰 이슬이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깜깜한 밤에도  이슬은 벌써 내립니다.

깊은 밤 풀 숲 주위를 돌다 보면 샌들 신은 발이 촉촉해져 옵니다..
며칠 전에 읽은

이덕무의 가을을 노래한 시가 기억났습니다.
 

*****
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 
발 밖의 물과 하늘 청명한 가을일 레 
앞산에 잎새 지고 매미소리 멀어져 
막대 끌고 나와 보니 곳마다 가을일 레 
******

실학자인 그도 가을의 정념에는 어쩔 수 없는 감상이 인 듯합니다. 
청망한 가을일 레, 

곳마다 가을일 레,
 

사실 가을 소리도 사위에 가득합니다.
홀로 산에 오르다 보면

상수리 지는 소리가 겁나 큽니다.  

후드득 떨어지는 갈참나무 입지는 소리도 생각보다는 커요. 
소나무 잎 가리나 무 되어 슬며시 지는 소리
노간주나무 울퉁불퉁한 몸 스쳐 지나가며 부딪히는 소리
가장 큰 소리는 줄곧 습기 가득 차 있던 탱탱한 나뭇잎들 건조해지며 

바람 불 때마다 부딪히며 바스락 거리는 소리입니다.
 

소리뿐이겠습니까,
가을의 향 또한 순후 해져 갑니다.
잡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돼지풀, 사데풀, 잔디들 
말라가는  대신 깊은 향을 내뿜습니다. 
아마 작아져 가는 만큼, 

사그라져 가는 만큼.
꼭 그만큼의 향을 세상에 내어 놓겠지요. 
숲의 나무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살쪄가는 열매의 향기 못지않게 가을 숲은 향기의 세상입니다. 

기러기가 날아오는 초후(初候)입니다.
이제 조금 있어 중후(中候)가 되면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말후(末候)가 되면 뭇새들이 먹이를 저장하는 시간이 되겠지요.
차가운 이슬이 내리기 전
흰이슬의  시간에
안부를 물을 길 없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난데없이 
그대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포도 순절(葡萄旬節)에 기체후 일향 만강하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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