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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통샤인머스캣 Apr 07. 2021

지옥 같은 현실에서 엿보이는 무지개 같은 순간의 천국

 이 세상의 지옥은 어디일까? 국민행복도 꼴찌, 자살률 1위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지옥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살아갈까? 그 나라는 북한도, 일본도 러시아도 중국도 아닌 다름 아닌 우리 대한민국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민행복도는 OECD 34개국 중 34위, 학생 삶의 만족도가 48개국 중 47위라고 한다. 어느 초등학생은 학원 가라는 어머니를 가장 고통스럽게 씹어 먹고 싶다는 장문의 동시를 잔혹하게 썼었는데, 이 동시집 출판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초등학생이 싫은데도 학원을 가게 하는 선행교육이 아동학대가 아닌가라며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2019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6.9명으로 OECD 평균 자살률의 2배가 넘고, 2위와의 상당한 격차를 보이는 독보적인 1위의 불명예를 16년째 유지하고 있다. 국민 행복도 꼴찌, 자살률 1위가 일본이었다면, 혹은 북한이었다면  인터넷 댓글에 이런저런 수긍할만한 이유들이 올라왔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선 자살공화국인 우리나라를 어떻게 분석할까? 주입식 입시 교육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교육으로 멍든 경쟁적인 환경에서 아이들이 적응하다 보니 인성교육이 애초부터 글러먹은 환경이었을까?  인간 존중의 문화나 시민의식은 시험 용으로 잠깐 머릿속에 두었다가 내팽개치는 그저 그런 필기과목일까? 어쨌든 10대부터 30대의 사망원인이 1위가 자살인만큼 정신건강이 매우 불량한 환경에 처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 취지에서 정신건강 정책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척되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일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행복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제언을 한 적도 있었다. https://brunch.co.kr/@sangsooleemd/56


 죽지 못해 사는 걸까? 어쩌다가 헬조선이 되었을까?  장탄식이 나오는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가고, 나에게 닥친 이 문제를 어떻게 의미 부여해서 어떤 기억으로 만드냐에 따라 우리가 살았던 곳이 그나마 덜 고통스럽게 견딜 수 있는 살아갈만한 곳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힘든 현실에서조차 긍정적인 소망을 갖고, 역경 속에서도 의미 있는 도전을 계속해 나간다면, 자신에게 먼저 기억되는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 앞에 닥친 역경, 고난은 우리 자신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극적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삶의 문제와 조건을 활용해 소중한 나를 진정성 있게 발견하고, 개성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재해석해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이타적인 존재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내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렇게 쌓인 우리의 삶의 흔적들이 모여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추억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환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내가 쓰는 인생 이야기를 우리 주변의 소외되고 고통받은 남을  돕는 노력으로 구성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성경에는 부자의 집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고 연명했던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인데, 2천 년 전에도 이런 양극화의 현실이 있었을 줄이야.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호의호식하며 잔치를  벌이지만  죽은 후 하늘에서 위로를 받은 운명의 주인공은 나사로였다. 그나마 부자는 이름도 안 나오는데, 거지는 나사로란 이름으로 나온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이 땅을 살아가는 순간에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기억될 수 있었을까? 이유 없이 너무 고통을 받는 것도 더 큰 차원에서 보자면 어떤 보상이 있다는 것일까? 어쨌든 그는 위로를 받을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경을 정신과 의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천국의 본질은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닐까 싶다. 조물주가 계시다면, 공감능력이 뛰어나시고, 사랑으로 가득 찬 따뜻한 분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한다. 실제 구약 성서에서도 wonderful counselor란 표현이 나온다.

초연한 이타주의적 작은 친절을 베풀었을 거라 생각되는 나사로. 작은 친절을 통해 그는 상대방에게  그 순간 천국을 보여주지 않았을까.나의 친절한  말도 오늘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나사로에게 이 땅의 삶은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내면도 지옥이었을까? 혹시 나사로는 힘들었던 삶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조물주께 아름답게 기억되는 추억을 남기지 않았을까? 이를 테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는 구제를 했다던가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없었던 자신보다 더 어려운 거지를 돕는 일로 조물주의 편에서 볼 때 감동을 주지는 않았을까?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은 채  마음속 한편에 부자에 대한 속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며, 그를 위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성자처럼 살아갔던 것일까?


 십여 년 전에 필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정신과학회에 논문 포스터를 발표하러 간 일이 있었다.

증빙자료 참고. 딱 10년 전이었다. 2011년 호텔에 머무를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WS 우승했던 기억이 난다.


카페에 잠시 들렸다가 나오는 길에 어느 흑인 노숙인이 먹을 것을 찾는지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남이 먹다 버린 빵을 찾았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그 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기 주위로 몰려든 비둘기들에게 자신의 빵을 떼어서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 보였다. 비둘기에게 이것 좀 먹으라고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 생경했지만 그 일상의 여유를 누리는 것 같아 유독 행복해 보였다. 비둘기의 처지를 자신과 똑같이 생각했던 것일까? 자신이 먹기에도 빵이 부족했을 텐데, 자신이 한 입 먹고 나서, 빵을 잘라서 던져 주는 모습을 한동안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숭고한 그 마음이 내게 전해져 잠시 경건한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보는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으리라 생각된다. 빵을 먹으면서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던 표정과 자신의 처지에도 아랑곳없이 생명을 돌보는 그의 고귀한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가 저 사람의 처지였다면, 과연 저분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혹시 나사로의 모습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사로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만의 행복의 길을 찾아냈던 것은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든다.


 작은 친절을 통해 누리는 행복감의 추억은 영원한 자산이 된다

 ‘행복은 매일 발생하는 작은 친절이나 기쁨 속에 있다’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그런 말에 잠깐 감동을 받고 커다란 완전한 행복을 찾아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일상에서 작은 친절에 기뻐하고, 느린 소박한 삶의 방식에 웃음 짓고 행복했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응답하라 드라마 류에서 우리가 빠져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그런 행복을 더 많이 느꼈었던 것을 그리워하는 것 때문은 아닐까.


 인간은 원래 작은 감정적 보상을 통해서 힘든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 프랭클린이 말한 일상에서 자신이 만들어 가는 작은 친절과 기쁨의 추억들은 천국에서 느끼는 행복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그러니 기회가 있는 대로 만끽해야 옳다.


 데일 카네기는 ‘아마 당신은 오늘 한 친절한 말을 잊어버리겠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평생 그 말을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다’란 말을 남겼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하는 친절한 말한 마디를 누군가는 잊지 않고, 그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게 넉넉한 미소를 짓는 일조차도 상대방에게 행복한 순간의 기억을 만들어 주는 기회가 된다. 이런 삶의 행복한 순간들의 기억을 줄줄이 엮어 간직하면 행복감을 느끼는데 평생의 자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삶의 현실이 비록 열악하다 할지라도 이런 기억을 갖고 현실을 버틴다면, 어떻게든 문제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삶을 사느냐 죽느냐로 생존의 관점에서 자신이 뒤쳐질까만 고민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지 가치 있는 삶의 생존의 관점에서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이타적 존재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기회를 늘리면서 인생이란 마라톤을 끝까지 완주할 때, 우리는 결국 나사로처럼 위대한 조물주께 기억되는 그런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가치 있는 행동으로 달콤한 감동의 순간을 선사한 아름다운 존재로 기억되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닐까 싶다. 거지 나사로의 삶은 결국 불멸의 가치를 둔 행동으로 그의 마음속에는 천국을 이루지 않았을까? 어쩌면  위로받을 만한 나사로도 그렇게 작은 친절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고마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자신만의 행복의 길을 찾아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지옥 같은 삶에서 살아갈만한 이유이자 자기 존재에 대한 친절하고 달콤한 위로의 선물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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