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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통샤인머스캣 Apr 04. 2021

초.이.초연한 이타적 존재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경천애인의 사랑과 홍익인간의 이타심을 품는다면,  

 Do no harm을 넘어 홍익인간의 이타심이 인류에게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Do no harm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Primum non nocere ) 환자에게 어쨌든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뜻일 게다. 사실 우리는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기에도 바쁘다. 너무 벅찬 일정을 소화하며 여러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골몰하는 가운데 의도치 않게 남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현대 사회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가치일 것이다.


부활절 아침.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는 누군가를 위한 짐을 지고 살아간다. 어떤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혹은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도록 후회 없는 삶의 준비를 해야만 하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의 삶에서 초연하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전략을 제안하는데, 경천애인의 사랑과 홍익인간의 이타심을 품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연습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홍익인간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으로 자기를 넘어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인류애의 고귀한 가치가 들어가 있다. 경천애인은 말 그대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건강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마음 매력 통통 신경망의 모듈에서 제안한 세 방향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원리가 구현된 것이다.


  Do no harm의 소극적 이타심을 넘어 홍익인간의 적극적 이타심이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다. 만약 우리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작은 선행과 호의를 베풀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마음매력 신경망의 시냅스 뇌 회로가 치밀해지고 더 강화될 것이다. 신경세포의 입장에서 죽기 전에 크게 한 번 하는 선행보다 일상에서 작은 선행을 지속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신호가 된다. 양보운전을 하고,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거나 받은 호의에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되며 신경세포의 시냅스를 강화하는 보상적 자극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계속해나가면, 우리 내면은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변할 것이고,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공자의 7대손 공빈이 고대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쓴 ‘동이열전’에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동방예의 군자 지국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는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 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권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 바른 군자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나의 선 할아버지 공자께서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면서 결코 그 삶이 누추하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다.”


 전설 같은 이야기 같지만, 우리나라가 대대로 평화를 사랑하고, 손님과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적 전통을 가진 것은 남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문화적 전통의 명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각자도생을 외치며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며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냉엄한 현실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보편적인 아름다운 가치를 실천하고, 자신이 받은 재능을 나누어 남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홍익인간의 가치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자신에게 있는 아름다운 가치를 나누기 위해 힘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하는 홍익인간은 마음매력이 구현된 인간으로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지구촌 곳곳에서 끔찍한 자살폭탄테러와 혐오 범죄와 총기난사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잔인한 테러들은 무참히 인명을 살해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짓밟아버리고, 우리 안의 이타적인 마음을 빼앗아가 버린다. 순교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살인은 누군가에게 원한과 복수의 덫을 놓게 하며,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형상이 담긴 인간을 살해함으로, 종교적 가치를 훼손하고 초기 신앙공동체가 남긴 훌륭한 전통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나마 테러의 현장에서도 사람들을 구하는 위대한 영웅들의 모습은 위로가 되고, 그런 홍익인간의 존재는 전 세계인의 가슴에 인간적 가치가 얼마나 빛나는 가치임을 깨우쳐 준다.


우리 각자가 홍익인간이 되어 남을 유익하게 돕고, 생명을 존중하는 안전한 공동체를 이뤄간다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자신은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힘들고 열악한 현실에서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이타적 존재로 자신에게만큼은 그렇게 의미 있는 존재로 기억되지 않을까.


 남을 살리는 이타심은 자신의 몸에 기억된다

 경천애인과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자신과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공동체를 살리는 행동을 지속하려면, 일상의 작은 선택과 결정이 과연 나와 남을 살리는 것인가? 란 질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선택이 나만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나?를 신중히 고려할 때, 우리는 공동체를 살려내는 이타적인 삶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마음매력적인 온정 문화에 묻어가는 전략도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남을 돕고 남을 살리는 이타적인 사람은 더 건강하다는 것이다. 조건 없이 남을 도울 때 느끼는 심리적 만족감은 ‘헬퍼스 하이’라고 한다. 미국의 내과의사 앨런 룩스가 선행의 치유력(2001)이라는 책에서 최초로 언급한 개념인데, 2003년 미국 미시간대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남을 도울 때의 심리적 만족감은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감소시키고, 엔돌핀의 분비가 3배 이상 올라가며, 면역력도 강화되는 결과를 확인했다. 우리 유전자에 남을 돕는 이타심을 좋은 신호로 여기는 기제가 심겨진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찾아가 돕게 되면, 그들은 우리를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우리 자신은 또한 그런 일로 인해 심리적 만족감을 얻으며 더 건강해질 수 있으니 남을 돕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한 때 즐겁게 했던 일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일부분이 된다.’고 헬렌 켈러가 말했다. 남을 돕고, 도움을 받는 것에 감사하는 따뜻하고 즐거운 경험 자체에 대한 기억은 내 몸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또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아서 우리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그 따뜻함이 전해질 때, 우리의 공동체는 좀 더 따뜻하고 살만한 사회가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를 간직하며 타인에 대해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그런 마음매력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지 않을까. 그 가운데 나도 그런 빛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하게 이타적 존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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