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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통샤인머스캣 Apr 08. 2021

끊임없이 성찰하는 인간, 초연한 이타주의적 삶의 혁신

절대자의 시선으로 내면의 중심을 성찰하며 1년만 살아본다면, 당선자로서

 사실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초연한 이타적 존재로 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차원의 관점을 상정해 보는 것이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로 사랑을 실천하자는 초.이.스 전략을 말씀드렸다. 정치인들이 정점의 권력에서 부끄러운 일들을 하며 일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리에 가기까지 평생에 걸쳐서 공들인 작업을 한순간의 일탈로 날려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왜 반복되는 것일까. 최상위 정점에 입지에 올라가게 되면 눈높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나. 그래서 사물의 본질을 보는 관점이나 기준이 달라져 부패하기 쉬운 입장에 환경적 자극에 노출되는 것 같다. '적당히 일을 하며, 안 걸리면 그만이다'라는 식으로 발각되기 전에 자신의 권력으로 잘못을 은폐하거나, 잘못이 드러나면 남 탓을 하며, 어떻게든 살아 남기 위해 자신의 초심이 담긴 본질적인 가치관을 저버리며 합리화를 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것을 지키려는 모습에 국민들은 실망한다. 이렇게 자신이 정한 가치관을 관리하는 동기가 느슨해지는 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상정한 신 앞의 단독자처럼 내면을 성찰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생각조차도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고, 조물주의 입장에서 정직하게 살피려 노력하는 것이다.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자는 입장에 다름 아니다. 당선된 정치인이라면, 임기 동안만이라도 이렇게 살아보려고 자신과 약속을 하는 것이다. 나름의 초연한 이타주의적 존재로 절제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공익을 위한 길이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름답게 기억되는 길이다.


 우리의 생각이 머물다가 스쳐가는 공간이 작업기억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의 생각은 이 공간에서 머물렀다 나간다.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작업기억을 아름답게 지켜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것처럼,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절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작업기억을 관리하는 것이다. 작업기억을 관리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 수 있게 현재의 일상 의식을 깨끗하게 지켜내는 노력과 맞물린다.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이 한정된 순간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시선을 의식한다면 고맙게 기억되도록 말하고,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랑하며 봉사할 수 있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지켜내는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보는 성경적 관점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신성한 성품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다. 그것은 자신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가치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성찰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말과 선행을 통해 지옥 같은 삶의 현실에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잘 될 수밖에 없다. 선거 후보자라면 행여 어제 낙선했더라도 결국엔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음번에 당선되고야 말 것이다.


 퇴근길에 건물 사이로 잠깐 보이는 붉은 노을의 낙조를 보며 이런 장엄함을 느낄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스팔트 빈틈 사이로 핀 민들레꽃을 보며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나에게 붙어있는 생명의 엄중함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의 자극은 우리 뇌 해마의 단기 기억의 시냅스를 강화한다. 시냅스가 강화되는 원리는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우리 삶에서 펼쳐지는 반복적인 자극은 키나아제들이 핵 안으로 진입하게 만들어 유전자 발현과 새 시냅스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장기기억을 위한 유전자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CREB-1 단백질들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기억 촉진 유전자를 억제하는 CREB-2 단백질들은 비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기억들을 보유하는 시냅스가 생성되기 위해서 이런 과정을 통해 해마에서 장기강화 LTP가 일어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시냅스가 강화된 신경구조가 만들어지면, 아름다움의 기억이 물리적 실체를 갖는 구조물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라고 하셨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기 마련이다. 예수님이 전한 사랑의 말씀이 난이도가 있는 말씀 일텐데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뇌 속 어딘가에 시냅스의 장기 강화가 이뤄낸 아름다운 가치로 구성된 영적인 감각의 회로를 열어주시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런 화두를 던진 것은 인간의 의식은 원래 한계가 없다고 보기에 결심한 만큼 이뤄지고, 닮기 위해 노력한 만큼 인간은 닮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 참되고 현명한 본성이 심겨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 유일하고 독창적인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그리고 고마움을 찾고, 누리고 남기고 떠나보겠다는 결심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살아도 죽은 목숨이 있고 죽어도 영원히 기억되는 삶이 있다. 초연한 이타주의적 사랑 실천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실현시키며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살고 싶지 않은가? 아니면 그저 내 욕구만을 위해서 살다가 내 몫만 챙기고 홀연히 살다갈 것인가?


 기독교가 초연함과 이타주의를 잃어버릴 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내 안의 잠재된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자존감을 지키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공감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시선이 가는 곳에 자신의 시선도 함께 머물 것이다. 이 세상에 가장 안타까운 일, 있어서는 안 될 그런 불공정한 문제, 인권유린의 문제, 환경파괴나 자살폭탄테러와 같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려 노력할 것이다. 사랑, 정의, 나눔, 희생과 같은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동들을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고맙게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보는 인간에 대한 관점은 인간을 귀한 존재로 보고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가치관에 문제를 제기한다. 신의 형상으로 시작했지만, 바로 얼마지나지 않아 하나님마저 후회하실 정도로 답이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조물주가 후회하셨다는 표현을 보니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나온다. 그렇다. 조물주는 인간 마음의 계획을 보고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셨다.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을 거부하고, 신이 되기 위한 도전적 길을 선택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충분히 악해질 수 있는 그런 존재다인간은 결과적으로 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던 영적 회로가 단절됐을 가능성이 있고, 공허해진 그 빈자리의 고통을 회피해보고자 현시적이고 물욕적인 가치들이 파고들었을지 모른다. 임상 현장에서 보는 중독의 그림자가 그렇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복음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직접 해결하려고 하셨다고 본다. 그런데 그 방식이 자못 충격적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대신 보내서 죗값으로 죽이는 방식이었다. 그 당사자는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그저 다 이루었다는 말만 남긴채 죽으셨다.


  그나마 희망을 걸 존재들은 제자들은 사명을 맡길 인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함량 미달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너무 인간적인 제자들이라고 해야 할까. 수제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를 세 번 퍼붓기도 하고, 은 30에 스승을 팔기도 했고, 중요한 시기에 나 몰라라 제 살 길 찾아 다 도망가 버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처절하게 부르짖으신 것을 보면 최후의 순간에 아버지에게도 외면받으신 것 같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진 죄인이 된 그 순간만큼은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공감을 중시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보자면,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부모로서 아들을 보는 심정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해야 하는 그 긴장점에 대한 공감이 있을 때, 이 믿음을 좇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는 이유와 그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맥락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한 장소는 파티장도 아닌 십자가였고, 조롱하는 강도와 군중을 향해 용서하시며 눈을 감으셨다. 결국 기독교의 핵심 복음은 공감이고 사랑이다. 구원의 방식은 설명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사랑이다. 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려는 계명은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픔에 공감해야 비로소 내면의 단절되었던 영적 회로가 그렇게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낙은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거꾸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도 결코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삶으로 증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쩌면 지탄의 대상이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더 높은 존재가 나를 내려다본다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지옥 같은 삶의 현장에 서서 아프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우리의 관심과 시선이 머물고, 고통받은 이웃들에게 다가갈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고마운 한줄기 빛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과 남을 사랑하면서 이 세상에 사랑의 흔적을 남길까?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되는 것을 추구한다는 삶은 가치 있는 행동으로 달콤한 감동의 순간을 선사한 아름다운 존재로 기억되는 삶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만으로도 훌륭하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만큼은 남들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도 멋있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마음을 지키고, 가치 있는 행동을 하고, 초연한 이타적 존재로 선행을 하는 그런 차원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다스리도록 지켜주는 원동력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당선자처럼 1년만 살아본다면, 초연한 이타주의적 삶의 혁신을 이뤄낸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최소한 초심만큼은 언제나 지키려고 노력했었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달콤한 보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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