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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Sep 01. 2017

한국 물 좀 먹어보자

전자책으로 ♡國한다


중학생 시절

시험 끝나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책방이었다.

더우면 책이 상하기라도 하는지 그곳은 매 서늘했다.

걸핏하면 흘러내리는 띠지에 신경을 빼앗기고,

종잇장 휘리릭 넘겨 책 바람 냄새를 맡고,

금박 인쇄된 글자에 괜히 손가락을 따라 흘려보기도 하던 책방 탐방.

책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십 년 넘게 외국물을 먹어도,

영어로 된 교과서를 사시사철 옆구리에 끼고 다녀도,

꼬부랑 글자 리포트를 수백 매 써도

영어 읽기는 마음을 먹어야

한주울 두주울 시작이다.


눈칫밥 먹으며 공수해 온,

또는 주머니 사정 넉넉해 별 무리 없이 모셔온 책들이

캐나다 이민 사회를 돌고 돌다

동네 도서관 또는 교회에 모인다.


허름한 궤짝에 든 우리 교회 작은 도서관.

정체 모를 가루를 탁 탁 쳐내고

울긋불긋한 커피색 종잇장을 만지고 나면

괜스레 화끈거려 손을 씻는다.

그렇게 서서히 전자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전자책은 종이책만큼

물리적 감각의 욕구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인터넷에서 훨훨 활개 치며 다니는 활자를

책 단위로 소유할 수 있게 해준다.

한 가지 주제 아래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정보의 집합은 전달도 훨씬 빠르다.

글쓴이의 인간됨이 녹아 있는 정다운 배움이다.


딱딱한 스크린 뒤에 숨은 글자를 만질 수는 없지만

마주 본 그 모습이 한글이어서 좋다.

대화로는 느낄 수 없는 농축된 우리말의 맛.

한국어를 새로운 감각으로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글자를 통해서다.


영어로 된 책을 읽을 때는 이런 해체의 화학반응을 즐길 수 없다.

나에게 영어 문장은 '주어+have+p.p' 같은 수식의 견고한 결합이다.

플라스틱 레고 맛.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의 영어 표현이 어떠하다는 원어민의 감상을 간혹 듣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옳은 문법으로 짜 맞추었을 뿐

내 글의 맛도 모르고 차려내는 모양이다.

쓰는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한글로 접하는 글은 색도 맛도 훨씬 선명해

만들고 먹는 재미가 있다.


손에 잡발로 디딜 수는 없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한국 물에 목마른 나의 뿌리가

계속 자란다.


한국이 고프면 이북 리더를 꺼낸다.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바쁘게 살아가는 그곳.

한국 사는 누군가와 같은 책을 읽고 있다.

지금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구나, 한다.





글, 그림 상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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