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 서른, 두 여자의 글쓰기 프로젝트 <무쓸모임>
지금까지 산 집이 대체 몇 개일까.
자타공인 떠돌이 삶을 살았던 내가 거쳐 간 집을 세어보니 열둘이다. 가장 어렸을 적 산 곳은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작은 타운하우스였다. 물론 그 집에 대한 기억은 따로 없고 언젠가 다 크고 나서 부모님과 그곳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이 집을 눈앞에 놓고 그들의 젊었을 시절을 아련하게 회고하는 모습과 동생과 나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어쩔 줄 모르고 지루해하던 일이 떠오른다.
첫 집을 떠났을 때 내 나이는 세 살이었다. 이후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눈에도 그 동네는 가끔만 초록이고 나머지는 시멘트였다. 쌍문동 하면 왜인지 우중충한 하늘과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떠오른다. 우리 가족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와 신내동 조그만 아파트에 잠깐 살았다. 같은 서울인데도 신내동은 아주 달랐다. 아파트 뒷동산에 있던 과수원과 서향 작은방을 강렬하게 침수하던 노을빛, 하늘을 메운 잠자리 떼, 자동차 꽁지에 달린 고드름을 모으러 다닌 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은 걸 보면 자연과 조금 더 가까운 동네였다. 다음 집은 바둑판처럼 정돈된 성남시 분당이다. 정든마을이라는 동네에서 사 년, 근처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마을에서 또다시 사 년 정도 산 거로 내 유년기는 마무리되었다. 용인시로 이사했을 땐 우울한 사춘기를 시작하는 참이었다. 그곳에 마음 붙일 새도 없이 뜬금없는 피지행에 처했다.
피지에서도 두 번 거처를 옮겼다. 모든 게 귀해서 누구 친척이 한국서 보내 준 택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그렇게도 반가웠다. 라면에서는 이상한 중국 향신료 맛이 났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는 수밖에 없었다. 한인 식당에서 같은 한국 사람에게만 특별히 판다는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30분을 운전하고 한 시간 반을 기다려서 먹은 적도 있다. 기대하던 배달 짜장 맛이 아니었지만, 짜장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에 우리 가족은 너무 좋아했다.
그런 생활에 신물이 날 무렵 캐나다 밴쿠버로 다시 먼 길을 떠났다. 반지하 셋방... 이라고 하면 매우 궁핍한 생활이 예상되지만, 밴쿠버에는 앞에서 보면 반지하지만 뒷마당으로 들어오면 일 층인 집이 흔했다. 그곳에서 재미없는 고등학교 생활을 해치우고 미국 브루클린에서 대학을 다녔다. 비싼 도시 집값 때문에 사 년을 동안 나는 방 한 칸을 온전히 가져보지 못했다. 꼭 누군가와 반반 나눠 썼다. 침대 두 개를 놓을 공간이 없어서 이층침대에서 한 학기를 보낼 때도 있었고, 룸메이트와 싸워서 한 방 안에서 눈도 안 마주치며 몇 달을 살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일 년간 뉴저지 팰리세이드 파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아이들 미술 과외를 하며 지내다가 캐나다 킹스턴에 이사 와 있는 가족과 합류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느라 잠시 알고 지내다 연락이 끊긴 사람이 부지기수였는데, 킹스턴은 어릴 적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곳이다. 킹스턴이라는 땅 보다는 사람들에 마음이 붙은 것 같다. 그렇게 간만에 사귄 사람들과 떨어져야 할 시간이 오자 나는 여느 때처럼 땅바닥에 들러붙어 다음 행선지를 묻는 기도를 올렸다. ‘오타와.’ 내가 들은 소리, 생각, 또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게 어디 붙어있는 땅인지 몰랐지만 일단 키치너로 이사 가는 가족 곁에 몇 달간 붙어 있다가 마침내 아무런 연고도 없이 오타와에 반지하 셋방을 구했다.
이번에는 반지하 셋방이라는 말의 구차함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집이었다. 나는 거기 사는 두 달 새 자주 아팠다. 눅눅하고 어둡진 기운 때문인지, 매일매일 얼굴도 모르는 서른여 명 아이들의 신변이 나에게 달려 있다는 새내기 기간제 교사의 두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랬다. 그 집을 나오며 반지하는 살 곳이 못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다시 키치너 가족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미니멀리즘에 푹 빠져 물건을 정리해 나갔지만 그림을 그리는 이상 잡동사니를 피할 길은 없었다. 사실 그림이랑 1도 상관없는 짐이 더 많았지만… 그렇게 어설픈 예행연습을 하고 두 번째로 얻은 집, 아니 방은 전과 비교해 과히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층에 있는 데다 크기도 넓고 창문도 컸다. 창문이 과하게 커서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추웠지만, 많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오타와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꽤 정들어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옮겨 다녔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집을 탐방하게 될지. 한 곳에 쭉 산 사람은 집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내 몸 누일 곳이 없어 본 적은 없지만 나는 항상 집을 향한 그리움에 시달린다. 집은 내가 적응해야 할 공간이었지 나로부터 온 공간은 아니었다. 나를 닮도록 오래오래 가꿀 수 있다면, 다른 이와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영원히 내 것인 집이 있다면. 집값이 천정부지인 세상에 사노라면 집이라는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나의 온 인생을 바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