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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Jan 13. 2017

사회정의와 세월호, 그리고 공감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우리 사회를 향해 말하는 것

2014년 4월 16일 304명의 사망자를 낸 세월호 참사가 지난 1월 9일로 1,000일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참사 당일 행적 논란의 당사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요.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는데”라고 했다지요?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순간 깜빡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 공감능력(共感能力) 결핍 문제의 한 단면이 아닌가 합니다.  


공감을 대체로 'empathy'라고 번역하는데요, 'empathy'에는 감정이입이라는 의미도 있지요.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 또는 EQ(emotional quotient)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슬픔, 기쁨, 억울함, 환희 등 타인의 감정을 내 감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지요. 공감능력은 극히 일부 고등 동물만 가지고 있는 능력이랍니다. 인간은 공감능력을 어느 정도 타고난다고 하는데요, 일례로 아기 앞에서 엄마가 우는 시늉을 하면 아기는 따로 울 일이 없어도 울음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곧잘 따라 울지요. 그러나 타고난 공감능력도 지속적으로 일깨우고 발전 지키지 않으면 퇴화되어 버립니다.   

또한 공감은 문학과 예술이 작동하는 주된 방식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화자나 작품 속 인물이 되어 그들이 느낄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합니다. 그러나 감정이입이라면 누구보다도 시인들이지요.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를 감상해 보셨나요? 시인은 울컥울컥 쏟아지는 간장 밑에서 알들을 지키려는 어미 게에게 자신을 투영합니다. 고 신영복 교수는 이 시를 보고 나서 간장게장 먹기가 힘들었다고 쓰기도 했지요.


이런 공감능력, 감정이입 능력이 문학과 예술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면 궤변일까요?


<정의론>을 쓴 미국의 법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의의 원칙은 무지(無知)의 베일 뒤에서 선택된다. The principles of justice are chosen behind a veil of ignorance.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무지'란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일까요? 나의 사회 경제적 위치, 연령, 학벌, 인맥, 외모 등 내 입장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나만의 특성을 모른다는 의미지요. 이러한 특성이 모두 배제된 상태, 다시 말하면 한 사회의 지극히 보편적인 구성원이 갖는 관점에서 사회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무엇이 공정한 원칙인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존 롤스는 이렇게 개인적 특성이 배제된, 사회 보편의 관점을 '원형原形 관점(original position)'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쉽게 말해 원형 관점은 내가 어떤 가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야 할지 전혀 모른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어떤 사회가 살만한 사회인가를 보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존 롤스의 <정의론>은 좌파의 논리도 우파의 논리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의 논리도 부자의 논리도 아닙니다. 전체 가구의 20%를 차지하는 년 가계소득 1,620만 원 이하 가정의 고닲음도 이해해야 하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열심히 벌어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가계소득 7,320 만원 이상의 상위 20% 입장에도 서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공공정책을 책임진 사람이라면 12.5%에 달하는 실업 청년의 입장, 전체 여성 근로자의 41%에 달하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입장은 물론 과세 표준 소득액이 1억 5천만 원을 넘겨 초과분에 대해 누진세율 38%의 종합소득세를 내야 하는 고소득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나서 '우리 사회는 과연 공정한가?'를 진지하게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어이없는 사고로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은 지 1,000일이 지나도록 그날 정부는 왜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속 시원한 답변 한 번 듣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의 입장에서도 '과연 이 사회는 살아갈 만한 곳인가?'를 자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철저히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을 규정하는 나의 모든 특성을 잊고 원형 관점에서 사회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처한 개별 상황을 두루 파악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즉 공감능력, 감정이입 능력이 필요합니다. 공감능력이 결핍된 지도자에게는 세월호 참사란 단지 '하필 일정을 빼 논 날 벌어진 귀찮은 일'이나 '야당의 정략적 이용이 우려되는 사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환경은 어떻습니까?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과 예술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고, 여러 사회 구성원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합니까? 입시위주의 교육과정이 우리 아이들에게 감수성을 가다듬고 공감능력을 배양할 기회를 제대로 줍니까?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거쳐 공직사회에 입문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직자의 자질을 업무능력과 줄 세우기로만 평가한다면 우리 사회는 냉혹한 지능형 기회주의자만을 골라 인재로 둔갑시키고 그들에게 우리 사회를 이끌게 하는 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했던 청와대 비서진과 각부처 고위직들만 해도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터진 후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더군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사랑하는 아이들을 얼음장 처럼 차가운 바다에 묻고 절망하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는 커녕 국민적인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을 지도하라? 공감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과연 가능한 지시일까요?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2014년 8월 23일자 메모

물론 풍부한 감성지능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문화계를 통제의 대상으로 보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겠다는 발상부터 애초에 하지 않았겠지요. 공감능력, 감성지능이 결핍된 분들이 소위 '엘리트'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정의를 기대하겠습니까?


공감능력은 문학과 예술을 음미하고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정의론>을 통해 존 롤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신다면 다음엔 탁월한 공감능력을 지닌 분을 지도자로 뽑으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공부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풍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심어주는 것은 어떨까요?
존 롤스 (Harvard Gazette; used under a fair use statement)


서상원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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