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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Sep 04. 2022

출장;음식

중고 신입의 열다섯 번째 이야기

미국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벌써 세 달이 지났다. 함께 출장에 동행했던 어린 동료와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였다. 한국 들어와서 곧바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출장을 마치자마자 서로 다른 부서 배치를 받은 데다, 내가 파견까지 나가는 통에 서로 저녁 식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일부러 내가 있는 곳까지 불러서 식사와 함께 술 한잔을 기울였다.     


고등학교를 올해 졸업한 친구라 술 한잔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생일이 지나서 괜찮다면서 어린 동기는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출장 중에 내가 괜한 꼰대 짓을 한 건 없나 싶어 가볍게 이번 출장에 대해 물어보았다.     


“출장이 좋은 점이 뭔지 아냐? 남의 돈 가지고 여행을 간다는 거야. 그래서 첫 해외 출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거든. 이번 출장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뭐야?”     


그는 주저 없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미국 음식들 원 없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예상했던 이야기지만, 막상 그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힘들었던 음식에 관한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단 일주일간의 지방 출장도 귀찮고 힘든 판에, 몇 주에 걸친 해외 출장이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역시나 나이가 들수록 점점 힘든 부분은 체력적으로 새로운 환경과 시간대를 바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요일에 도착해서 다음 날부터 업무를 봐야 하는 나로서는 일에 대한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시차 적응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음식이라도 맞았더라면 그나마 수월하게 버텼을 텐데, 다음날 오후 3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쏟아지는 졸음에 몸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

그에 비해 나와 함께 출장을 온 만 19세의 동료는 새로운 환경이 마냥 신기하고 좋았던 모양이다. ‘피곤하지 않냐?’는 말에 그의 대답은 어린 친구들의 엉뚱함마저 느껴졌다.     

“한국에서도 늦게 자는 편이라 견딜 만한데요.”     


그의 젊은 체력이 부러운 건지 아니면 그의 생활 습관이 부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미국 출장에 빨리 적응하는 그를 보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 싶었다.      


이번 미국 출장을 경험하면서 공식적인 미팅이나 업무적인 소통은 통역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맡아서 해주었다. 다만 내가 생활하면서 해야 할 기본적인 소통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어린 동료의 의사소통마저도 오롯이 나의 몫이 돼버리고 말았다.     


업무 시간뿐 아니라 업무 이외의 시간에도 붙어 지내는 사이가 되어버린 나로서는 아침저녁 출퇴근과 저녁 식사까지 신경 써야만 했다. 마치 동료가 아닌 어린 상사를 모시고 출장을 온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들 정도였다. 심지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는 친구들의 처지가 머나먼 미국 땅에서 떠오르기까지 했다.     


‘나는 관대하다.’     


영화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이 적군을 향해 외쳤던 유명한 대사가 떠올랐다. 나이 많은 선배로서 이번 출장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다짐으로 나를 향해 끊임없이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나 그 다짐도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기름기 많은 미국 음식을 끼니마다 먹는 것이 어찌나 힘들던지 출장 마지막에 가서는 피부가 다 뒤집어질 정도로 힘들었다.

그날도 미국식 후라이드 치킨을 먹고 싶다는 그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여 근처 KFC를 퇴근길에 들렀다.  ‘나는 관대하다.’ 함께 가는 차 안에서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몇 개 먹을래?”     


“16 피스요.”     


“X XX야! 그냥 8피스 먹어. 나 안 먹을 거니까 너 그냥 8개 다 먹어.”     


급기야 입에서 욕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요즘 같은 회사 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 안에 있던 화가 이성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것 같았다.  



   

수육에 국밥을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당시 나의 표정을 보면서 느낀 점을 꺼냈다.     


“차장님, 제가 16피스 시킨다고 하니까 거의 울기 직전이더라고요. 그런 표정을 보니까 얼마나 힘드실까 싶더라고요.”     


“그래 그때 살려줘서 고맙다. 그것 시켰으면, 속은 속대로 뒤집어지고, 아마 삐쳐서 한 일주일 말도 안 했을 거야.”     


친구 자식뻘인 직장 동료지만, 나름 나를 상사로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협업하면서 나 스스로 ‘세대차이’란 내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일을 넘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 출장을 통해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지금의 세대와 맞춰 가기가 쉽지 않음’을 스스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수육에 국밥 그리고 시큼한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이 없다고 느끼는 나를 지금의 어린 친구들이 맞춰주는 모습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처럼 저녁 식사와 맥주까지 시원하게 쐈다. 다음 달에 또 온다는 녀석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괜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미국에서의 저녁식사_일주일에 3일은 라면을 먹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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