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차현유(3)

by 상재

15.


성주 어른은 전횡과 무관하였지만, 차 아저씨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성주전에는 성주 고신걸 어른과 왕자 문신보 어른이 함께 있었다. 소란이 벌어지니 그 일을 논의하려고 모인 듯했다.


두 어른은 성주전 마당에 몰려든 군민을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차 아저씨는 이윽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성주전 마당은 농기구를 들고 인상을 쓴 군민들로 살기가 넘실거렸지만, 그것과 대비되게 차 아저씨의 연설은 참 느긋하고 나긋해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성주께서는 오랜 세월 탐라의 토호로 지내셨소. 군림한 세월만큼이나 탐라 군민의 존경을 받아오셨습니다. 허나 박 목사의 전횡이 시작된 이후 성주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소. 원과 고려 사이에서 줄타기 하며 권세를 잃지 않으려 참으로 애쓰셨소. 탐라 사정에 어두운 박윤청이 강남의 부호를 어찌 알았을까? 심만삼은 고작 사오 년에 한 차례 올 뿐이오. 지금껏 무역을 주관한 성주의 소개 없이 안면을 틀 수 있는 자도 아니오.”


“차공,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탐라는 고려에 속하게 되었소. 성주 작위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나 또한 목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요.”


성주 어른은 항변했다. 그러나 차 아저씨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심가의 선박에 대해 함구했어야지! 가만히만 있었어도 이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소. 게다가 심가와의 무역엔 탐라 백성의 몫도 조금은 있지 않습니까? 그것마저 모조리 빼앗아야 했단 말이오?”


“궤변이오.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고신걸!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모지리 아닌가!”


그때, 강백안 아저씨가 문득 나섰다.


“성주께서 어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이익만을 쫓았다면 심만삼을 탐라로 이끌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로를 독점하면 훨씬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왜 안 그러겠습니까? 현유 형님이 탐라의 군민을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기에 나섰던 것입니다.”

성주 어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쳐다봤다. 나는 그제야 박윤청의 전횡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성주 어른이 괜히 미워서 함부로 대하였지만, 한편으로 알뜰히 챙겨주었기에 미안한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러한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다. 차 아저씨가 성주 어른에게 물은 것은 방임의 죄였다.


박윤청 목사와 김계생의 전횡을 왜 모른척 하였느냐, 탐라의 성주로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


고개 숙인 성주 어른과 왕자 어른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작아 보였다.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적어도 우리 아버지는 비겁하지 않았다. 목숨을 대가로 자부심을 지켰다.


한스러운 죽음이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차 아저씨가 성주 어른을 다그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을 내게 보여준 이유도 알게 되었다.


아저씨는 내게 용기를 가지라고, 스스로 일어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유, 이만하면 되었네. 예 아저씨가 말했다.


차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성주, 우리는 사흘 동안 성주전에 머물겠소.


예 아저씨가 군민들을 향해 외쳤다. 성주의 곳간을 열어 밥을 짓고 소와 말을 잡으시오. 기분이나 풀어봅시다!


성난 군민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성주전 마당에 갑자기 축제가 열렸다.


나도 자리 하나를 차지하여 앉았다.


성주, 왕자 어른이 방으로 들어가자 예 아저씨가 옆으로 와서 말했다. 밤중에 성주를 지켜보아라.


나는 어리둥절했다. 방으로 들어간 성주 어른을 어떻게 지켜보라는 것인지.


그날 밤. 성주, 왕자 두 어른이 방을 몰래 나왔다. 성주전 마당에서 설핏 잠들었던 나는 두 어른이 방을 나오는 장면을 놓칠 뻔했다.


왕자 어른이 속삭였다. 성주,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거요? 우리가 뭘 잘못한 것 같잖소.


성주 어른이 대답했다. 조용히 갑시다.


왕자 어른이 재차 물었다. 사흘이면 물러갈 텐데 도둑놈처럼 밤중에 도망 나올 이유가 뭡니까?


성주 어른이 말했다. 그 후엔, 우리를 살려 둔답니까?


성주 어른은 왕자 어른의 옷소매를 붙잡고 정낭을 넘어 올레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성주 어른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차 아저씨가 약속한 삼일을 버틸 배짱도 없는 것이다. 소위 토호라는 작자의 밑바닥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이튿날 군민들은 성주 어른이 성주전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차 아저씨는 예 아저씨와 실없는 소리를 나누며 껄껄 웃었다.


조정의 대리(大吏)를 죽이고 토호를 욕보였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 나의 걱정과 우려는 타당한 것이었지만, 두 아저씨의 즐거운 모습을 보니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날 아저씨들은 우리 집으로 와서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주, 왕자 어른이 여러 토관을 대동하고 와서 두 아저씨를 포박해 갔다.


마을 사람들이 아저씨들을 끌고 가는 성주 어른을 향해 비난하는 말들을 던졌다.


강백안 아저씨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두 아저씨와 의형제를 맺고 친형처럼 따랐으니 강백안 아저씨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사실 나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 아저씨가 내 어깨를 잡았다. 가자, 가서 끝까지 지켜보자!


우리는 군민들과 함께 처형장으로 향하였다. 형식적인 조사와 짤막한 문답이 이루어진 이후, 차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성주, 고려에서 안무사를 보낼까, 아니면 만호를 보낼까?”


“목사를 죽였잖소. 기대하지 마시오. 만호를 보내어 탐라를 토벌하고 굴복시키려 할 것이오.”


“성주, 아단부카를 기억하시오? 탐노의 아버지 말이오. 탐라가 고려에 예속된 이후에도 아단부카는 고려와 제법 잘 지내었소. 그때라고 간악한 목사들의 행패가 없었겠소? 누군가는 군민을 위해 여러 사람을 달래가며 노력하였던 것이오. 돌이켜보면 우리는 서로 사이가 좋았던 것 같소. 모두 아단부카 덕분이 아니었을까? 성주, 이제 그 역할을 누가 했으면 좋겠습니까?”


“나라고 마음이 마냥 편한 줄 아시오? 도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이보시오, 차공! 성주 작위 같은 건 진작에 끝장났어!”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시오! 목사의 행태를 보고도 어찌 눈을 감으시는가! 성주, 눈을 뜨시오!”


나는 불현듯 성주 어른 앞으로 뛰어가 무릎을 꿇었다.


성주 어른, 제가 맹랑하였어요. 앞으로는 어르신께 함부로 하지 않겠어요. 아버지가 성주 어른 때문에 죽었다는 원망도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성주 어른, 현유 아저씨를 살려주세요!


성주 어른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서도 물방울이 맺혀 흘렀다.


네 잘못이 아니야. 탐노야,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다 탐노야.


귓가게 차 아저씨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성주, 그 마음을 잊지 마시오! 도망치지 마시오!


차현유 아저씨와 예성지 아저씨의 목은 아버지처럼 나무상자에 담겨 개경으로 보내어졌다.


남은 시신을 마을 삼촌들과 함께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활활 타오르는 아저씨들의 마지막은 뜨겁고 눈부셨다.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삶은 정말 외로운 것이었다. 처음부터 혼자였으면 이런 괴로움도 없었을 것인데, 어째서 하늘은 주었다 뺏기를 반복하는 것일까?


싱숭생숭한 기분에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총모자 할머니의 집 앞이었다.


매일 같이 왔던 곳이었지만, 최영 장군에게 말을 모조리 빼앗긴 이후에는 처음이었다.


말총이 없으니 여기 올 일도 없었다. 이제 할머니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쓸쓸히 발길을 돌리는데, 뒤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탐노?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툭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구나. 밥이나 먹고 가거라.


할머니는 무심한 말투와는 다르게, 내 옷자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나는 끌려가듯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지만, 억지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부엌으로 가서 귀한 감주를 또 내오셨다.


바빴니?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말총이 없다고 대답했다.


오다가다 그냥 들르면 되지.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왔다. 말총이 없어도 된단다. 말총이 없어도 들르란다. 말총이 없어도 나는 여기에 와서 감주를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꼭 안았다. 할머니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괜찮다, 다 괜찮다. 살암시믄 살아진다. 반년 공들인 총모자를 빼앗겨도, 겨우내 추운 바당에서 캔 전복을 다 앗아가도, 살암시믄 다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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