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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08. 2022

시옷의 세계

ㅅ, ㅅ, 시옷 자로 시작하는 말은

  '사람을 잘 사귀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잘 다가가고, 잘 대해주고,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고 잘 논다. 유쾌하고 단순하게 깔깔거리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나는 누군가에게 잘 다가가질 못한다. 잘 대해주지도 못한다. 자주 연락할 줄도 모르고 자주 만날 줄도 모르고 잘 놀 줄도 모른다. 사람은 언제나 어렵다. 사람 앞에서 나는 언제나 서툴다.
  그나마 내가 친해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먼저 내게 다가와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가왔던 사람들 몇몇은 더 즐거운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고 도 멀어져 갔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과 마주하는 혼자만의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고마워하는 마음과 마주하는 혼자만의 시간도 많아졌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오래 교차될 때, 나는 그리움이란 직물을 직조해낸다. 혼자만의 방에서, 이 직물에 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귀는 나만의 방식이다. 그 직물을 무릎담요처럼 덮고서 나는 시를 섰다.'

  처음 이 책을 읽어야지 생각한 건 바로 저 글을 읽은 후였다. 나는 굉장히 무신경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관심을 두지 않은 것에는 굉장히 무신경 그 자체다. 자랑거리는 결코 아니지만, 솔직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올해 여름, 잠깐 헬스클럽을 다닌 적이 있다. 다니고 얼마 후, 혼자서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트레이너 분과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내 옆에 다가왔다. 여자분에게 스쿼트를 가르치시던 헬스 트레이너 분께서는 "저분처럼 하시면 돼요."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가리켰다. 멋쩍은 채로 계속해서 스쿼트를 하고 있는데, 그 여자분이 나한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로 시작해서 내 나이를 묻고, 어느새 애교 있게 "언니~"라고 호칭도 바꿔 나를 불렀다. 스쿼트 자세를 가르쳐주고,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나는 러닝머신으로 향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러닝머신 위를 45분에서 1시간 정도 달렸다. 러닝머신 아래로 내려온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분명 아까 이야기를 나눌 때, 스쿼트랑 마무리 운동만 하고 간다던 여학생이 다른 헬스 기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아무리 무신경해도 그렇지, 거의 한 시간을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니.


  그 여학생과 함께 헬스클럽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그 여학생은 처음 보는 나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자신이 어린데 왜 직장을 다니고 있는지, 자신은 보통 몇 시에 헬스장에 오는지, 나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오빠가 있는데 자신과는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도 잘 걸고, 자신의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하는 이 친구가 굉장히 부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나의 무신경함과 이 친구에 대한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아쉽게도 나는 학교를 다녀서 줄곧 오전에 운동을 갔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 친구를 만난 적은 없었다.


  이 글을 읽었는데, 그때 그 친구가 떠올랐다. 사람을 잘 사귀는 이들이 아직도 나는 참 부럽다. 물론 김소연 시인처럼 나도 더 즐거운 사람들 속으로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머물러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커다랗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느끼는 당신과 당신이 느끼는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 당신 앞에 있는 나는 과연 나인가. 당신은 당신으로 내 앞에 있는가. 당신이 느끼는 당신과 내게 보여주는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어디까지가 거짓말인가.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못났든,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들려주는 말들을 사랑한다. 그게 거짓투성이여도 상관없다.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당신을, 나는 당신이라고 부르려 한다. 당신이 들려주는 말들을 당신의 진심이라고 여기려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함께 믿고 싶기 때문이다. 당신의 실체와 당신의 이상형 사이에서, 당신의 이상형에 당신이 기꺼이 기울 때를,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내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안 보여주고 싶어 하는 당신의 실체는 어찌 될 것인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여 당신의 내부 어디에선가 불쌍히 쪼그려 흐느끼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당신의 실체와 나는 당신이라는 중개인 없이 꿈속에서 만난다. 꿈속에서 만나 서로 싸우고 악담하다 화해하고 함께 흐느껴 운다. 실은, 또 다른 내가 당신의 실체와 함께 내 꿈속에서 살고 있다. 더 리얼하게, 더 치명적이게, 어쩌면 더 굳건하게.'

  나는 이 글이 이 책 속 이야기들 중 가장 좋다. 고민 없이 바로 말할 수 있다. 정말 그 정도로 좋다. 정말 신기한 게 사람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모를 것 같다. 아마 죽는 순간에도, 죽은 후에도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수능을 치른 고3 동생을 만났다. 그 동생은 자신이 가끔 너무 '가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했다. 어떤 요지로 말하는 건지, 바로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고민을 했었다.


  나는 배운 대로 행동을 하는 편이다. 그런 행동 중에는 분명 도덕 교과서에나 적혀 있을 법한 행동들도 있다. 나는 길거리에 쓰레기가 내 눈에 보이면 줍고 싶다. 그러니까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 거야!라는 큰 포부나 내가 바로 착한 아이에요라고 홍보하고 싶은 생각으로 하는 행동은 아니다. 다만 그냥 길가에 쓰레기가 있으면 주우라고 어릴 때부터 들었고, 그래서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안하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함께라서 모른 척 교문 앞에서 봐놓고 그냥 지나쳤다가 집까지 갔다가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 그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었다. 고등학생 때는 아침마다 등굣길에 보이는 쓰레기를 줍곤 했었다. 물론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다. 내 눈에 우연히 보였고, 그건 내가 주워야 할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게 '예쁨'이나 '칭찬'을 받고 싶어서 그런 건지 혼란스러웠었다. 신기하게도 정말 별 것 없이 한 행동인데, 그렇게 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보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조차도 내가 '가식'이나 '위선'인지 헷갈렸다. 정말 아무 의미 없이 했던 행동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 같다. 남들 눈에 '가식'처럼 보일 나를 걱정하면서 쓰레기를 줍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 신경 쓰여서 이불 킥을 날리는 대신 그냥 내가 편하게 살자고. '위선'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고 내가 왜 '위악'을 부릴 필요가 없었다.


  힘들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쟤, 왜 저리? 윽, 착한 척." 이러던 사람들도 그냥 매일 그러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 쟤 그냥 원래 저런 캐릭터구나."하고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에 덩달아 큰 의미 부여하면서 피곤하게 살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사실 타인들에게 그렇게까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반대로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에 대해 잘 알 때가 있다. 그래서 사실 꾸며낸 자신과 진짜 자신에 대한 고민으로 너무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고3 동생을 위로했었다. 너를 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실 너를 모르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고, 또 의외로 알고 있다면 네가 모르는 너의 나쁜 점만큼 너의 좋은 점도 알고 있을 거라고 말해줬다. 꾸며낸 것은 언젠가 들통이 나게 마련이고, 사실 사람들은 꽤나 사람들을 정확하게 보고 자신의 곁에 두니까 그 사람들은 그냥 너를 좋아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던 것 같다. 덧붙여서 네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자신도 네가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은 자신도 사실은 너의 말과 행동에 다 묻어 나오니까 크게 너 자신을 '위선'이나 '위악'으로 가리려 하지 말고 그냥 조금 더 자신을 아껴주라고 말했다.


  내 이런 이야기가 고3 동생에게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저 글을 읽고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나를 모르듯이, 너도 너를 모를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당신을 나는 사랑하고, 당신이 들려주는 말들을 사랑한다고. 당신의 거짓투성이 속에서도 나는 진심을 보고 듣는다. 당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믿고 싶다. 정말 그렇다. 고3 동생아, 내가 너를 믿는다. 얼굴에 철판을 500개는 깔아놓은 듯 넉살이 좋은 너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울적해하는 너도, 내가 믿는다. 멀어 보이기만 하는 그 양극단의 모습에서도 똑같이 '너'라는 진심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진심을 가진 너를 내가 참 격하게 아낀다. 힘내라,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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