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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0. 2022

리스본행 야간열차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삶.

  하루는 지나치게 길고, 일주일은 금방 지나가버리는 시간을 보내는 우리들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봤을 것이다. 그런 삶을 동경도 해보고, 시기도 해봤을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한 편의 영화로, 한 곡의 음악으로, 단 한 명의 사람으로.

  자신의 삶이 지금의 궤도와는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면 어떨까? 심지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방식의 삶이라면!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의 이야기다.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 불리는 노교수의 이야기. 빗속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여자의 발음 하나만으로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싶게 된 낭만적인 사람의 이야기. 동네 책방에서 누군가가 읽던 책의 서문을 읽고 무작정 여행을 결심한 패기 넘치는 사람의 이야기. 유난히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던 안경을 쓰고 살았으며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아파도 하고 슬퍼도 하는 사람의 이야기. 누군가의 인생을 아끼고 아껴 읽을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의 이야기. 그러니까,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그레고리우스 교수님의 경우는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의 『웅 오우리베스 다스 팔라브라스(UNOUOIVES DAS PALAVRAS)』,(리스보아(LISBOA), 1975)라는 책이 바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이 되었다. 번역하면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이 책은 의사였던 한 사내가 인생을 담은 책이다. 그레고리우스 교수는 서문만으로 미친 듯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책 속의 인물의 흔적을 따라 멀고도 가까운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그레고리우스 교수의 덜컹거리는 기차 옆 좌석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책을 다시 짚는 그레고리우스 교수의 옆자리에, 새 안경을 끼고 감동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그레고리우스 교수가 보이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그렇게 그레고리우스 교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개인적으로 독일어와 포르투갈어는 딱딱한 발음이 뭔가 어렵게 느껴져서 크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배우고 싶은 새로운 언어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딘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해보고 싶기도 하다. 갓 세상에 태어난 아이처럼 모든 게 신기하고, 궁금하고, 오래 눈길을 두고 싶다.


  일기일회(一期一會)  
  평생에 단 한 번 만남. 또는, 그 일이 생애에 단 한 번뿐인 일임. 사람과의 만남 등의 기회를 소중히 함의 비유.


  그레고리우스 교수의 일기일회는 빗속에서 우연히 만난 포르투갈 여인일 수도 있고, 동네 책방에서 접한 『웅 오우리베스 다스 팔라브라스(UNOUOIVES DAS PALAVRAS)』일 수도 있고, 그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 의사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신의 주치의 독시아데스 또는 과거의 부인이었던 플로렌스일 수도 있다.


  평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이다. GOD 분들께서 부른 '반대가 끌리는 이유'의 가사처럼 '살아가면서 한 번 올까 말까 한' 그런 만남. 2015년도 기준 우리나라 평균 기대수명은 81.8세이다. 누군가는 80년을 넘게 살면서도 단 한 번을 만나지 못하기도 한다. 내가 새겨놓은 삶과 흔적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미래를 꿈꾸게 하는, 그런 만남을 말이다. 그게 글이든, 영상이든, 노래든, 사람이든.


  만약 커다란 울림을 주는 무언가를 마주했다면 기꺼이 미친 듯 달려들어보는 것도 꽤 멋진 일 아닐까.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는 만남은 아니니까.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고 '파리'에 너무 가고 싶어 졌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를 읽고 '일어'를 너무 배우고 싶어 졌다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나서는 '기차 여행'이 너~무 떠나고 싶어져 버리는 거다.

  그레고리우스는 부벤베르크 광장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평생을 살아온 이곳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여기가 집이었다. 심한 근시인 그에게 이런 낯익음은 중요했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자신이 사는 도시는 비닐하우스나 동굴, 안전한 건축물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위험했다. 그의 안경만큼 두꺼운 안경을 쓴 사람만이 이런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플로렌스는 그 느낌을 알지 못했다. 그가 왜 비행기 여행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비행기에 올라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는 사실-그 중간에 놓인 개별적인 모습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은 그레고리우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건 옳지 않아. 그의 말에 플로렌스가 "옳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라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왜 완행열차를 선택했느냐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지금 들고 있는 책을 마저 다 읽으려고 탔다고 대답했다. 『말이 있기 전, 세상의 침묵』이라는 프랑스 책이었다. 그녀는 기차만큼 책 읽기에 좋은 장소는 없다고, 새로운 것을 향해 자기가 이렇게 마음을 활짝 여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그래서 완행열차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타인'과 '관계'를 생각하면 뭔가 막막하다. 손에 잡히지 않게 막연하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어디로 튈지를 모르겠다. 이 책에서 찾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 그들의 '관계'에 대한 시선이 몇 가지 떠오른다.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너 자신을 알라.' 이 간단명료한 진리를 실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나와 정반대의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라니. 꽤 쌈빡한 조언이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뭐가 거슬리고 닮고 싶은지, 등등.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란 참 신기하다, 정말.


  "물론 우린 더위가 가시고 햇빛에 금빛 그림자가 드리우는 가을이 되면 학교 복도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소. 하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헤어지면서 아마데우스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선생들 모두와 악수를 하며 따뜻하고 우아한 인사말을 했소. 난 그때 잠깐 동안 그가 대통령 같다는 생각을 했소."
  신부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훌륭할 필요는 없었는데, 약간 머뭇거리면서 서툴게 더듬어도 됐는데……. 다듬지 않은 원석처럼 말이오. 광택을 약간 덜 낸 대리석처럼……."
  바르톨로메우 신부와는 다른 선생들과 다르게 작별을 했어야 했는데……. 그레고리우스가 생각했다. 다른 단어로, 더 개인적인 말로, 포옹도 하면서. 아마데우가 다른 선생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작별인사를 해서 신부는 슬펐던 것이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플 만큼.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열대어』라는 작품에도 비슷한 대화가 나온다.

"누구한테나 다정하다는 것은 아무한테도 다정하지 않다는 것과 같지 않을까?"

  사람이란 누구나 누군가에게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그런 존재이고 싶은가 보다.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해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내가 요즘 새삼 깨닫는 게 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사실은 뒤통수 맞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컴퓨터 활용능력 시험을 준비하는데, 많은 블로거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시험의 난제는 난생처음 배워보는 생소한 '액세스'가 아니라 언젠가 한 번쯤은 다뤄본 듯 친숙한 '엑셀'이라고. 시험만이 아니라 사실 인간관계야말로 내가 친하다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가까이의 지인에게 사실 관심 부족일 때가 많다. 새벽, 아침, 오전, 낮, 오후, 저녁, 밤의 온도가 같은 하루라도 다 다른 것처럼 사람도 그 안에 수많은 모습이 가득가득하다. 그래서 꾸준한 애정으로 서로를 지켜볼 때 그 관계가 더 좋게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상대방에게서 찾다 보면 정작 상대방이 내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놓치고 만다.


  새로운 낭만을 선사해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조만간 영화로 감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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