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May 10. 2022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

  이 시집의 마지막 발문에서 허수경 시인께서는 <천마총 놀이터>라는 시를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천마총으로 여행을 가는 집단적인 수학을 함께할 수 없었던 철저한 개인이 되어 소년은 그 시간을 소화한다. 세계를 소화할 수 없었던 것과는 가장 반대의 것이 이곳에서 벌어진다. 소외를 '시적', 혹은 '말놀이'라는 가장 고독하고 의미 없는 일로 변형시킨 이 자리에서 한 시인의 시언어가 발생한다. 천마총을 가지 못했던 기억으로 어쩌면 이 한 권의 시집은 시작되었고 끝을 맺을지 모르겠다. 가장 가고 싶었던 곳에 가지 못했던 그 "시차"에서 말은 나오고 인간의 저녁은 저물어 어둠이 올 때 이런 겨울이 온다.

  '시차'. 라는 단어가 정말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지금 있는 곳과 가고 싶은 곳, 혹은 가야 할 곳으로 어떤 거리감을 글감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개인에게 주어진 하나의 '괴리'는 많은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게 희망에 가깝다면 설렘과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가득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안하거나 초조하고 심지어는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이에 존재한다는 건, 혼자 어떤 곳에 남겨져 생각을 해야만 하는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건 어떤 걸까.



  올해 읽은 야마다 에이미 작가의 『나는 공부를 못해』라는 소설에는 '시차병'에 걸린 한 소년의 이야기가 짧게 나온다.

   다지마가 말한 가타야마의 이야기란 이런 거다. 그가 읽은 책에 나오는 말인데 인간이란 원래 25시간을 하루의 주기로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24시간의 주기에 맞추다보면 한 시간의 차이가 생긴다. 그럼 이 한 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식사나 일이나 놀이 같은 일상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사이에 조금씩조금씩 몸을 속이고 시간을 잘게잘게 쪼개 맞추어가기 때문에 어느덧 적응하게 된다. 그러나 그 중에는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몸을 속이는 데 실패하고 불면증에 걸리든지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_132
  '시차병.' 다지마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때 가타야마가 한 말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진짜로 그가 시차 조정을 할 수 없는 일생을 보냈다면, 그건 과연 어떤 인생이었을까. 단 한 시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그 기분은 어떤 것일까. 자신에게만 주어진 공백의 시간. 어쩌면 그것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고독과의 싸움이 아닐까.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이 투명인간이 돼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_137

  시차병에 걸린 가타야마는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타인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간을 채워나간다는 것. 많은 사람들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까? 소설 속 표현처럼 고독과의 싸움일 것이다. 하루, 이틀이야 좋을지도 모르지만 한평생을 남들이 모르는, 결코 알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삶을 연장한다는 것은 엄나게 커다란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물론 태생적으로 적응 능력이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의 괴리를 느끼고, 그 사이를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는 것이다. 가타야마 같은 경우는 후자의 가까웠다.



  시간이 한 시간 줄어드는 것보다는 늘어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원해서'라는 가정이 기본적으로 깔린 상황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그 모든 걸 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시차병'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에 기억나는 것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안방에 모여 여섯 식구가 다같이 잤던 겨울밤이었다. 여섯명이 머리를 맡대고 누워서 세 명씩 누웠다. 나랑 오빠가 마지막까지 깨어 TV에 나온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빠까지 잠이 들어버렸다. 내 양 옆으로 언니와 오빠가 있었고,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TV를 켜놓은 채로 둘 수 없어서 살짝 손을 꺼내 리모컨을 집어 TV를 껐다. 한순간에 스며드는 공포. 손 닿으면 닿을 곳에 가족이 있고, 따뜻한 이불 안에 포근하게 들어가있었는데도 겁이 났다. 나'만' 두고 모두가 잠이 든 것이다. 한참을 무서워하다가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지금까지도 꽤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가타야마는 그때의 나처럼 무섭지 않았을까.



  나는 굳이 따지자면, 남들이 못 보는 어두움을 보고, 쉽사리 그 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천재가 단명한다는 그런 말을 굳이 빗대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그만큼이나 힘들게 고민할 수도 있고,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기꺼이 눈길을 주고 자연스레 빠져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의 생각의 깊이는 아마 일반인과는 다르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표현력'을 얻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천재적인 작가나 화가, 음악가, 감독, 그런 분들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상처받을 수 있다’

  

  이성복 시인께서는 말씀하셨다. 정말 그렇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든 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든 게 정말 별의 별것일 수가 있다.

  '모든 게 별것'인 사람이야말로, 그래서 더 많이 아파하거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게 아닐까.

  남들이 스쳐지나가는 글귀 하나에도 절절하게 가슴 아파하고, 영화를 스토리, 배우, 구성, 장면, 소품, OST 각각을 다 느끼면서 볼 줄 알고, 음악의 멜로디만큼이나 가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스본행 야간열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