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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0. 2022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1985년 처음 출간 당시 제목은 『불타는 인내』

  여배우 손예진 씨 영화라고 하면 생각나는 게 몇 편 있다.

  2004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2003년 《클래식》, 그리고 2002년 《연애소설》.

  개인적으로 영화 《연애소설》은 떠올리면 항상 가족들과 식사하는 장면에서 수인(손예진)이 했던 대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화 《연애소설》 속에서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그 장면을 보고 영화 《일 포스티노》가 보고 싶어졌다.

  "전 지금 사랑에 빠졌어요.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게 되었다.

  '일 포스티노'는 이태리어로 '집배원'이라는 뜻이고, 원작 소설의 제목은 영화 제작 후 변경한 것이다.

  원래의 제목은『불타는 인내』로,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블로 네루다께서 연설에서 인용한 랭보 시인의 말에서 유래했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저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우체부 '마리오'의 우정을 다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슬라 네그라'는 산타아고 근처 해안 마을로, 네루다 없는 이슬라 네그라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작품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다. 1993년 시인의 사망 20주기를 맞아 파블로 네루다의 유해를 이슬라 네그라의 집으로 이장하기도 했고, 실제로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의 흔적을 찾는 발길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소설의 처음에서 마리오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던 그가 첫눈에 반한 베아트리스에게 시를 인용하여 사랑을 속삭이고, 웅변적인 바다의 소리에 놀라고 자신에 비하면 돌멩이마저도 수다스럽다고 느낀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만의 '메타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고 말하고자 한다. 얼마나 눈부신 변화인지 모른다.


  소설 속에서 네루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체부 '마리오'에게 또 다른 세상을 선사한다.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이 시를 통해, 메타포를 통해,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마리오에게 선사한 깨달음은 그야말로 신세계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도 커다란 선물을 받은 후 마리오의 삶은 유홍준 교수님의 말씀처럼 전과 같지 않았다. 유홍준 교수님께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서문에서 옛 글을 빌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나는 소설에서 마리오가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하면서 메타포에 대해 알게 되는 장면, 이슬라 네그라가 그립다는 네루다의 부탁으로 마리오가 녹음을 하는 장면, 파블로 네루다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장면을 최고라고 꼽는다. 바람 소리, 바닷소리, 갈매기 소리, 종소리, 이슬라 네그라의 소리를 그리워하는 파블로 네루다와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소리를 담으려 노력하는 마리오의 모습은 세상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읽기만 해도 마음 한 구석이 따듯해졌다. 그 밖에도 파블로 네루다를 하루에 두 번 만나기 위해 마리오가 전보와 편지를 따로 전달하는 장면, 베아트리스가 일하는 식당에서 무엇을 주문할 것인지 묻자 숨 쉬는 것조차 생각을 해야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두근거려하는 장면, 마리오가 생애 처음으로 편지로 파블로 네루다의 편지의 '추신'을 발견하고 환호하는 장면이 참 귀엽고 좋았다.


  편지의 '추신'이라는 부분.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파블로 네루다 아저씨, 제게는 어떤 추신을 선사해주실 건가요?


  내가 고른 오늘의 추신.

  "마리오, 내게는 『일상 송가』보다 훨씬 더 괜찮은 책들이 있네. 그리고 온갖 메타포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 부당한 일이야"
  "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시인은 마리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는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그렇게 쉬운 건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부르죠?"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의 단순함이나 복잡함과는 아무 상관없거든. 자네의 이론대로라면 날아다니는 작은 것은 마리포사(스페인어로 나비)처럼 긴 이름을 가지면 안 되겠네. 엘레판테(코끼리)는 마리포사와 글자 수가 같은데 훨씬 더 크고 날지도 못하잖아."
  네루다는 지쳐서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마리오에게 포구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하지만 마리오가 적절히 초를 쳤다.
  "제기랄,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
  "허허! 칠레에서는 모두가 시인이야. 계속 우체부를 하는 게 더 독창적이라고. 자네는 적어도 많이는 걸으니 살은 안 찌잖아. 칠레 시인들은 다 배불뚝일세."
  네루다가 다시 손잡이를 잡고 들어가려 했을 때 멀리 새가 나는 걸 바라보던 마리오가 말했다.
  "제가 시인이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리오."
  "네?"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어. 문을 닫을게."
  "네."
  "내일 보자고."
  "내일 뵙죠."
  네루다는 나머지 편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가 이윽고 문을 반쯤 열었다. 마리오는 팔짱을 끼고 구름을 뜯어보았다. 네루다가 곁으로 오더니 손가락으로 어깨를 쿡 찔렀다. 마리오는 그 자세 그대로 네루다를 쳐다보았다.
  "계속 여기 있을 것 같아 다시 문을 열였네."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네루다는 마리오의 팔꿈치를 움켜쥐고 자전거를 대놓은 외등 쪽으로 단호하게 끌고 갔다.
  "생각을 하려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말인가? 시인이 되고 싶으면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혹시 존 웨인처럼 걷는 것과 껌 씹는 걸 동시에는 못하는 거야? 당장 포구 해변으로 가라고. 바다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메타포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예를 하나 들어주세요."
  "이 시를 한번 들어보게."
 
여기 이슬라 네그라는 바다, 온통 바다라네.
순간순간 넘실거리며
예, 아니요, 아니요라고 말하지.
예라고 말하며 푸르게, 물거품으로, 말발굽을 울리고
아니요, 아니요라고 말하네.
잠잠히 있을 수는 없네.
나는 바다고
계속 바위섬을 두드리네.
바위섬을 설득하지 못할지라도.
푸른 표범 일곱 마리
푸른 개 일곱 마리
푸른 바다 일곱 개가
일곱 개 혀로
바위섬을 훑고
입 맞추고, 적시고
가슴을 두드리며
바다라는 이름을 되풀이하네.
 
  네루다는 만족하여 시를 멈췄다.
  "어때?"
  "이상해요."
  "'이상해요'라니. 이런 신랄한 비평가를 보았나."
  "아닙니다. 시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시를 낭송하시는 동안 제가 이상해졌다는 거예요."
  "친애하는 마리오, 좀 더 명확히 말할 수 없나. 자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침나절을 다 보낼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요. 시를 낭송하셨을 때 단어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그게 운율이란 것일세."
  "그리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너무 많이 움직여서 멀미가 났거든요."
  "멀미가 났다고."
  "그람여!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바로 그래요."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하지만 소용없어요. 순전히 우연히 튀어나왔을 뿐인걸요."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마리오는 손을 가슴에 댔다. 혀까지 치고 올라와 이빨 사이로 폭발하려는 환장할 심장 박동을 조절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리오는 걸음을 멈추고 고귀한 수신인의 코앞에 불경스러운 손가락을 바짝 들이대며 말하였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집, 사막, 비 ……."
  "……이제 그만 '기타 등등'이라고 해도 되네."
  "……기타 등등!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루다의 입은 턱이 빠질 듯이 떡 벌어졌다.
  "제 질문이 어리석었나요?"
  "아닐세, 아니야."
  "너무 이상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아니, 생각에 잠겼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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