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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1. 2022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참, 포도를 보면 포도를 먹으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나 지금 들어왔어요. 아까까지 먹었던 것이 금방 또 배가 고파요.
아이스박스를 역어보니 (이 아이스박스는 아주 조그만데 참 실속이 있어. 우리 이런 거라도 서울서 하나 가졌더라면) 핑크빛 포도 한 송이가 남아 있어요.
참, 포도를 보면 포도를 먹으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1963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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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유독 편지가 좋다. 그것도 손편지. 몇 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지내고 있다고 해도 휴대폰이나 이메일 한 번이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연락이 닿는다. 24시간 연중무휴 누군가와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몇 번만 두들기면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대.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의 손글씨가 그리운 것 같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마음을 가늠해보는 일, 썼다 지운 편지 속지를 쓰다듬는 일, 점점 더 다양해지는 편지지를 구경하는 일, 지저분하게 번진 연필이나 볼펜 자국을 살피는 일, 편지에 녹아든 누군가의 말투나 마음을 따라가 보는 일, 그런 것들이 좋다.


  아, 그러고 보니까 Y가 내가 준 편지를 읽고 그런 말을 했었다. 똑같은 말이라도 편지로 읽으면 말로 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든다고. 듣자마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말로 할 때는 상대방의 호흡으로 이야기가 전해진다. 네가 침을 삼키거나 숨을 몰아쉴 때 나도 같이 쉰다. 편지라는 건 읽는 이의 호흡에 따라 쉼표와 마침표가 생긴다. 예상치 못한 도치까지. 그런 것도 편지라는 매개체의 재미난 점이겠지.


  사랑해마지 않는 나의 9월. 2016년 스물네 살의 나의 9월을 이야기하자면, '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올 9월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브로콜리너마저'의 <편지>라는 곡이었다. '즐거운 일도 많지만 가끔 네 생각이 날 땐 조금은 미안했었어 있잖아 사실 난'으로 시작되는 고백은 보내지 못한 편지를 끄적이는 나와 같았다.

  분명 어느 때보다 즐거운 일도 감사한 일도 많던 9월이었다. 한참을 웃다가 잠든 밤도 있었고, 고마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고, 모닝콜 벨소리가 너-무 달콤해서 아침부터 설레던 날도 있었다. 9월의 서른 날 중에 스물예닐곱은 정말 즐거운 일이 많았다. 그런데 누가 툭하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가끔'의 나날도 있었다. 열에 하나 정도 있을까 말까 한 슬픔인데 생각보다 파장이 길어서 그 자국이 꽤 오래 남았다. 열에 하나라고 할 지라도, 내게는 그런 날이 흔치 않았으니까 더 놀랐던 것 같다. 어쨌든 내게 이미 새겨진 자국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생기는 주름 하나라 여기며 어여쁘게 다독여줘야지 다짐했다. 익숙해지지 않는 자국을 살피고 어루만질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따뜻함이었다.

  그 따뜻함을 편지에서 찾았다. 『반 고희,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고, 『이중섭 편지』라는 책도 읽었다. 9월 아르바이트비로는 김환기 화백께서 아내 김향안 님께 보낸 편지가 담긴 책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사서 읽었다. 읽고 있기만 해도 마음 한편이 따듯해져서 '브라운아이드소울'의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책들이었다.

 

  특히,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우리만의, 우리끼리만의. 함께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느꼈던 그 모든 것이 함축된 제목이 아닐까 싶다. 결정적으로 책 속에 실린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의 1957년 파리에서 찍은 사진이 정말 좋았다.

 

  스무 살 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내게 사랑의 이론을 가르쳐줬다면 올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는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셨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 더 빛이 났던 두 분을 보면서 '많이 사랑하는 것보다 잘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저자 정현주 작가님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들의 나날이 생각나요! 함께 해왔던 나날들도, 앞으로 함께 할 나날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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