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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5. 2022

일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3일의 소설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3일'이 책으로 나온다면 딱 이 소설이 아닐까. 가볍다고 진지하지 않은 게 아니고, 단순하다고 쉬운 게 아니다.​


  <잘 살겠습니다>에서 우리는 에비동 하나에서도 '특'과 '보통'의 차이를 체감하고, SNS 프로필 사진이 얼마나 개인적이지 않을 수 있는지를 배운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자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비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_28, 잘 살겠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주 슬프고 더러 기쁘다. 그러나 그 슬픔과 기쁨의 크기가 부디 빈도와 비례하지 않기를.

  사실 회사에서 울어본 적이 있다. 거북이알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케빈의 한숨 소리가 너무 신경 쓰여서 찰나의 순간만큼 짧게 운 적이 있었다. 화장실 문을 발로 세게 걷어차던 순간이었다. 문을 탕, 하고 걷어차는 순간 와륵, 눈물이 났고 그게 다였지만, 그걸 두고 울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_58, 일의 기쁨과 슬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속 "가만 보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아요."라는 말에 맞장구를 치던 사람이 그저 커피를 마시는 할머니의 종이컵 안에 엔화를 한 움큼 넣는 아이러니.


  <다소 낮음>에서 주인공 '장우'는 싱어송 라이터다. 가방 속에 시디 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고, 앨범 단위로만 음악을 듣고, 무조건 앨범 전체를 다운로드하여서 듣는 것이 음악을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는 '고장은 아닐' 4등급, 다소 낮음 냉장고와 '드럼보다 덩치도 크고 물도 많이 먹는 일반 세탁기'가 있다. 가전제품에 붙은 이 수식어가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 같아 나는 섬뜩했고 슬펐다.

  “이 사람아, 잘 생각해야 돼. 요즘은 그냥 순간이야, 순간. 딱 한곡이라고. 이 많고 많은 유혹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삼분 정도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그걸로 된 거야. 최선을 다한 거야.”
  장우는 시선을 내리깔고 주뼛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냉장고송은 그냥 유튜브용이에요. 거기서 사람들이 좋아해줬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말씀드리지만 저는 진정한 음악은 풀 렝스 앨범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장님도 밴드를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곡과 곡 사이에도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고 스토리가 있는 건데. 그렇죠?”
  이 대목에서 장우는 사장을 한번 힐끗 올려다보고 말을 이었다.
  “저는 곡이 한곡만 덜렁 있으면 뭐랄까요, 이를테면 뮤지컬을 보는데 인터미션부터 들어가는 기분 같아서요. 그러니까 소설책을 두 번째 장만 찢어서 가지는 사람은 없잖아요.”
_111, 다소 낮음


  <도움의 손길>은 지극히 자본주의스럽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 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대 중반, 이제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_142, 도움의 손길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에서 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화가 나고 기쁘다. 기분 좋은 긴장감을 두른 첫번째 출근길에서 세세하게 기록되지 않은 백한번째 이력서를 그 시간들을 유추할 수 있다.


  <새벽의 방문자들>의 소재는 다르지만 결국 현대인의 삶과 직장인이라는 점에서 이 책 속 다른 단편 소설들과 공통점을 같이 한다.


  <탐페레 공항>는 이 책 속 어느 단편보다 내게 소설(가상) 같았고, 그래서 더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원래 인생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법이니까.​


  '센스의 혁명'이라는 제목의 인아영 문학평론가님의 작품 해설도, '그게 무엇이든,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장류진 작가님의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도, 어쩜 이러나 싶게 마음에 든다. 히히.​

  먼저 이스터에그 몇 가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두 인물의 휴대폰에 동시에 울리는 알림은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다.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에서 언급된 화자의 연봉은 작품을 발표할 당시 유명 취업 포털에서 조사한 여성 신입사원 평균 연봉이다. 「새벽의 방문자들」 속 방문자들에 대한 외모 묘사는 내가 알고 있는 실제 인물들의 외양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_232, 작가의 말


  덧붙이는 말.

  하나, 오래간만에 생방송으로 챙겨 본 드라마 <스토브 리그>가 막을 내렸다.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이세영 팀장님이 부러웠고, 무엇보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둘, 친구랑 통화하다가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을 읽는다고 했더니 친구가 일의 기쁨이 어딨냐고 그랬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이 친구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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