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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6. 2022

소설 보다 : 여름 2020

당신은 정말이지 여름을 닮았군요 막 빛이 나요

  복효근 시인께서는 본인의 시를 통해 ‘여름의 명물은 매미’가 아닐까 유추하셨다. 올여름은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있는 큰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매미 소리를 들었다. 여태까지 살면서 귀뚜라미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고, 비행기 소리를 가장 의식하며 보낸 여름이었다.

  ‘소설 보다’ 시리즈 여름 2020에는 강화길 작가님의 「가원(佳園)」, 서이제 작가님의 「0%를 향하여」, 임솔아 작가님의 「희고 둥근 부분」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나보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 두 명이 둘 다 강화길 작가님의 「가원」이 좋았다고 그랬다. ‘다 옛날 일이다. 박윤보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가원은 여자의 호로 쓰이는 이름이다. 다 옛날 일이다. 모두.’로 끝이 난다. 옛날 일로 시작해서 옛날 일로 끝이 나는 이야기.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는 실은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미래를 자신의 무엇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의 웃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었던 거라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한평생 낮잠 한 번 편히 자지 못하는)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 자기에게 물어보는 이야기.


  사람 취향 잘 안 변한다. 나는 여전히 수미상관이 좋고, 신형철 평론가님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너무 우울해서 섬뜩한’ 사람보다 ‘너무 씩씩해서 보기 마음 짠한’ 사람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사실 나는 「0%를 향하여」가 제일 내 취향이었다. 관객 점유율 0%에 육박하는 영화가 독립영화라는 점에서 착안한 소설의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한국 박스오피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를 랭크 업하고, 내가 빌리고 싶은 책은 죄다 이미 예약이 되어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 성인의 연간 독서량은 6.1권(문체부, 국민독서실태조사, 2018.1~2019.9)이고, 독립예술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1% 미만(2019년 기준)일까. 이 소설 속 말처럼, 보는 사람만 보고 읽는 사람만 읽은 ‘그들만의 리그’인 걸까.


  “내가 말로 할 수 있었다면 말로 했지, 구태여 영화로 말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한마디로 될 일이었으면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되잖아요.”라는 화자의 속마음을 읽으며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는 아직 말로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은 ‘한마디로 요약하기를 거부하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 같은 게 없다. 심지어 이것마저도, 없는 건지 아직 내가 모르는 건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저렇게 제대로 자신의 속마음을 ‘로그라인’ 가능한 게 너무 멋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벌 때, 나는 종종 내 노동력이 아니라 내 시간을 팔고 있다는 생각’에 사무치게 공감한다. 주 5일 40시간 나는 내 시간을 팔고 있다.​


  임솔아 작가님은 나한테 어렵다. 임솔아 작가님을 알게 된 건 「최선의 삶」, 나한테는 전혀 희고 둥근 이미지가 아니었다. 어렵고 어둡다. 솔직히 소설을 읽다가 막막했다. 그런데 이번 「희고 둥근 부분」은 훨씬 희망적이었다. 내가 언젠가 황정은 작가님을 ‘아주 온기를 잃지는 않는’ 작가님이라고 수식했었는데, 이번 작품이 나에게는 임솔아 작가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 “하는 척은 할 만큼 했다는 건가요.”라고 민채가 진영에게 말할 때는 물론 섬뜩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춥지 않았다.

  맹점이 가져다주는 무지의 이중성과 양가성에 대해 두고두고 고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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