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미루지 마라.
정부장은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기 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주차장 한쪽에 회사의 자문 변호사인 황변호사의 차량이 보였다.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각서.. 아니, 변호사가 와 있으니 공증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 큰 돈을.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어제 술을 마시며, 홍사장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정부장이 회사 사무실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부장님! 역시! 그만두신 거 아니시죠? 다들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세요?”
“어? 어...그게...”
정부장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말을 망설이는데, 고과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부장을 쳐다보며 다가왔다.
“뭐예요? 그만둔 거 아니었어요?”
누구 때문에 지금 이 사달이 났는데!! 말하는 모양새가 영 싸가지가 없었다.
정 부장이 회사에 안 나와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던 고과장이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 와 고과장 저 새끼가 저지른 일인데요? 라며 고자질을 하기엔 정부장은 너무나 사람이 좋았다.
“어....”
말을 망설이는데 그때 홍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해?! 어서 들어와!”
“아, 예!”
홍사장은 회의실 입구 앞에 서 있다가 정부장이 허둥지둥 뛰어오자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황변호사가 앉아 있다가 정부장이 들어오자 일어나서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뭐지? 여태껏 황변호사가 나한테 이렇게 정중했던 적은 없었는데? 빚 갚으라는 종이에 사인하지 않을까 봐 저러나?
“아, 예. 안녕...하세요?”
밝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황변호사와는 반대로 정부장은 머뭇거리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저쪽에 앉아.”
홍사장이 정부장에게 황변호사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엔 서류 몇 장이 놓여있었다.
정부장이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정부장은 거기 사인해. 황변은 정부장한테 설명하고.”
빚 갚으라는 얘기를 무슨 미사여구로 포장하려고, 설명까지.....
정부장은 자신이 책임을 진다고 했기에 회사에 오긴 왔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 피할 생각은 없었다.
홍사장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지만,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외로워서 저런 걸 거라고 이해하기로 노력했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다 봤다.
금액이 얼마나 되려나?
빚이 얼마나 될까 걱정이 가득한 눈에는 글보다 숫자가 먼저 들어왔다.
뭐야? 1억5천?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우성과의 거래에서 3차까지 납품만 해도 발생하는 손실이 1억8천이었다.
다른 비용까지 합하면 2억은 훌쩍 넘는 액수가 될 것이었고.
정부장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은 금액이었다.
뭐지? 그래도 양심은 있는 건가?
정부장이 순간 고개를 들어 홍사장을 쳐다봤는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홍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했다.
사장과 직원이 아닌 채권자와 채무자의 눈맞춤이란.
정부장은 얼른 고개를 숙여 다시 서류를 봤다.
숫자를 먼저 확인했으니, 이번엔 글자를 확인할 차례였다.
서류엔 채무자.....란 말은 없었고....
연봉?
이.....이게 뭐야?
대표이사 정.대.운
어? 뭐?!! 뭐야? 도대체!!
정부장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사장을 쳐다보는데, 황변호사가 말했다.
“네. 그럼 지금부터 대표이사 변경 건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드리고, 절차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홍사장의 회사는 주식회사였다.
소규모 회사라 100퍼센트 지분이 홍사장에게 있었고, 감사나 임원들도 모두 친인척이었기에 홍사장의 결정이 곧 회사의 결정이었다.
“이....이게 뭐, 뭡니까? 사장님?”
“형님이라며?”
“아, 형니......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그런 말장난할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놈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어?!!”
홍사장이 소리를 지르자 황변호사가 중재를 했다.
“자자, 진정들 하시구요. 정부장님. 홍사장님께서는 정부장님이야말로 회사를 이끌어갈 적임자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 제가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금 저기 저 사장님이 저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멸시하시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장님?!”
정부장이 홍사장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며 외쳤다.
“아... 진짜 이 자식 이거는 끝까지... 여튼... 할 거야 말 거야?!”
“뭘요?”
“회사대표!”
“그야!..... 하면.... 좋죠. 그런데 도대체 왜요? 영문은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대표를 하면, 그럼? 사장님은요? 어디가세요? 혹시, 벌써 은퇴를 하실 건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안 되잖아요. 회사에서 가장 싫어하던 저를....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엘리트들도 엄청 많은데.... 그 사람들을 다 놔두고 저를...아!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그냥... 장난치는 거 맞죠?!”
정부장의 말에 홍사장이 한숨을 크게 쉬고 말했다.
“그냥 정부장이 이제부터 회사 대표해. 우리회사에서 제일 오래 근무했잖아.”
“그건... 그렇죠. 그렇다고 대표 자리를 그냥 주시는 건가요?”
“그래. 난 자식들한테 회사 막 물려주고 그런 것 싫어. 우리 애들 중에서도 아무도 이 회사 맡아서 하고싶어하는 녀석도 없고. 그러니까 정부장이 맡아서 해. 그리고.... 나 암이야. 이제 얼마 못살아.”
“예에?!!”
정부장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 이제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올 거야. 정리할 것들도 좀 있고, 몸에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서.”
“아니! 도대체!!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정부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뭘 말 안 해? 어제 말했잖아?”
“어제 언제요?!”
“너 때문에 암보다 혈압으로 먼저 죽겠다고 했잖아!”
“....?....”
“그러니까 너 나보고 혈압 있냐며?”
순간 어제 횟집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야.... 사장님이 저랑 이야기만 하면 암 걸릴 것 같다고 하시면서 늘 암을 입에 달고 사셨으니까 그러려니 했죠.....”
홍사장은 평소 자신의 언행이 눈앞에 선해 뜨끔했다.
“뭐.....내 말이 씨가 되긴 했네... 어쨌든 그리됐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앞으로도 좀 더 고생 하고. 회사 잘 이끌어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홍사장을 쳐다보던 정부장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크흡....”
“뭘 그렇게 울고 호들갑이야?”
“크흐흑.... 으아아아앙!!!”
정부장은 울음을 참다, 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우렁차게 울어버렸다.
회의실 밖에서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회의실 쪽으로 난 창을 쳐다봤다.
“황변. 블라인드 좀.”
“아, 네.”
홍사장의 말에 황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블라인드를 내렸다.
내려가는 블라인드 밖으로 비치는 사람들의 시선.
그들은 홍사장이 정부장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퍼부었거나, 줘 팼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계속 그렇게 울거야?!”
“흐어어엉.....죄...죄송해요 사장님....끄흑......그런데....눈물이... 멈추질 않아요....흐흑.....으앙!!”
홍사장은 정부장이 우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다가 말했다.
“우는 모습도 참 밉상이다....무슨 애야? 내가 지금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너 우는 모습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겠어?”
홍사장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장은 계속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해줘가지고.
“어휴....”
정부장이 한참을 우는 동안 홍사장은 여러 생각들을 했다.
저렇게 여린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인지.
아내와 자신이 힘들게 여기까지 이룬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회사를 좀먹는 인간은 없는지.....
어?
좀먹는 인간?
맞다!
회사를 유익하게 만드는 직원도 중요하지만, 회사를 좀먹는 인간을 골라내는 것도 중요했다.
홍사장은 자신이 공방 2층의 꿈속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속의 일일뿐.
아직 현실에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 확인을 해보진 못했다.
홍사장이 정부장을 슬쩍 떠봤다.
다행히(?) 홍사장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정부장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울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오늘 내가 정말 각서 쓰라고 부른 줄 알았어?”
“....네.....”
“근데, 이게 정부장이 각서를 쓸 일이야?”
“.....네?....”
“왜 남의 잘못까지 다 정부장이 떠안으려고 하는 거냐고. 그게 정말 부하직원을 위하는 거라 생각해?”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납품단가 그거. 고과장이 그랬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홍사장은 혹시나 하면서 정부장의 반응을 살폈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혹시 고과장이 말했습니까?”
정부장의 반응을 보니 꿈에서 본 내용은 사실이었다.
홍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말했겠어? 정부장이 덤터기 썼다고 좋아하고 있었겠지...... 지금까진.”
정부장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서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대체 그 공방은 뭘 하는 곳이지?
나의 지난 시간들과, 내가 보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어째서 난 그곳에서 보게 되었을까?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친 일들을 그곳에서 창을 통해 봤고, 지금처럼 그렇게 창을 통해서 봤던 일들은 꿈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홍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가볼 때가 있으니까, 나머진 황변하고 정부장 둘이서 알아서 해.”
“예? 아니.... 갑자기 어딜 가신다고...”
정부장이 퉁퉁 부은 눈으로 홍사장을 따라 일어섰다.
“따라 나오지 말고, 그거 서류 작성 마저 해!”
“예? 아...예.”
홍사장이 서둘러 회의실을 나서며 문을 닫아버렸다.
정부장은 도대체 뭐가 뭔지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자, 여기 서류를 보시면서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황변호사가 정부장에게 말하자 정부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인상을 구기진 않았지만, 이렇게 밝은 얼굴을 보인 적이 없는 황변호사가 오늘따라 깎듯이 행동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황변호사님.”
“아이구. 대표이사님이 되실 분께서..... 그냥 홍사장님처럼 황변이라고 짧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길면 불편하시잖아요.”
“아...네. 그렇게 할께요. 황변...... 근데.... 장이 굉장히 튼튼하실 것 같은 호칭이네요. 헤헤.”
정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머쓱해 어색하게 웃었다.
“네? 아....하하하하하!! 아이쿠. 새로 취임하실 대표님께서는 유머감각도 있으시네요. 그래도 설변 아닌 게 어딥니까? 하하하하!!”
황변호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농담을 던지고 일부러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게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부장은 황변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도 사장님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는 궁금함으로 가득했다.
.
.
.
.
아내와 헤어져 여관으로 돌아온 정섭씨는 며칠을 앓았다. 몸이 아파 앓았고, 마음이 아파 앓았다.
“형. 일 안 할거에요?”
영준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
“나 아파.”
“또 술병 났어요?”
“하아... 이 새끼가.. 나 지금 농담할 상태가 아니다.”
“언제 상태 좋았던 적이 있었나?”
평소 같으면 정섭씨가 또 한바탕 퍼부어 줬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운이 없어 그냥 끊었다.
정섭씨는 자신의 지난 일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아내가 겪었을 그 시간들에 대해서도.
처음이었다.
아내가 어떻게 살았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어쩌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여태껏 외면해 왔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면 늘 그랬든 술로 재워버렸다.
생각을 재웠고, 스스로를 재웠다.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에...
그렇게 외면했던 시간들을 대구탕 가게의 2층 공방에서 보게 되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그렇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뭐지?
뭘까?
그 가게는 도대체 뭐하는 곳이지?
정섭씨는 이불을 팍 걷어찼다.
“아야...”
온몸이 뻐근하게 뼈 마디마디가 쑤셨다.
오늘 같은 날은 계속 누워 있어야 했다.
몸이 아프니까.
그게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그 공방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정섭씨는 얼른 옷을 걸쳐 입었다.
대구탕 매장 앞에 도착하니 몇 대의 차가 서 있고, 그 사이로 냉동탑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대구탕 사장이 거래처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래명세서 여기 있습니다. 크~~ 이것 보십시오! 명세서가 이렇게 깔끔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동안 미수금이 쫙 깔려 있어서, 명세서가 지저분했는데, 오늘 이렇게 정리를 다 해주셔서 명세서가 깔끔하니, 너무 아름답습니다! 하하하!!”
“사장님이 가져다주시는 매끈~한 대구만큼이야 아름답겠습니까? 아하하하!!”
둘은 크게 웃었다.
뭐지? 저 븅신들은?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는 대구탕 사장과 거래처 직원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냉동탑차가 출발하자 정섭씨가 대구탕 사장에게 다가갔다.
그런 정섭씨를 보며 대구탕 사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하세요?”
“아...예. 저기 뭐 좀 물어보려고.....”
“아, 그런가요? 2층으로 올라가실래요? 먼저 오신 분들이 계셔서. 저도 곧 올라가겠습니다.”
“....?....”
대구탕 사장은 바쁜 듯 가게로 휙 들어갔다.
뭐야? 내가 무슨 말을 물어볼지 알고?
그리고..... 먼저 오신 분들?
정섭씨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자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파란 하늘과 푸른 숲이 울창한 산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에 놓인 탁자와 의자도 운치가 있었다.
이야~ 이런 테라스에서 진짜 술 한 잔......
정섭씨는 지난번과 똑같이 입맛을 다시며 공방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입구의 현판에 쓰여있는 시간을 달리는 공방이라는 글자가 눈을 찌르듯 달려들었다.
정섭씨는 순간 몸을 뒤로 젖히며 화들짝 놀랐다.
뭐야?!!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는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글자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정섭씨는 현판과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잠시 노려봤다가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지난번처럼 나무 냄새가 훅 풍겨왔다.
공사장의 토루판 냄새와 비슷해 익숙하고, 친숙한 냄새.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냄새.
킁킁?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지?
조금은 이질적인 냄새가 섞여 있어 정섭씨가 코를 벌렁거렸다.
기름 냄새?
저쪽을 보니 화이트보드 근처에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나무에 뭔가를 칠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구탕 사장이 말한 먼저 오신 분들인 모양이었다.
정섭씨는 어슬렁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에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그들도 정섭씨를 발견하고는 서로 짧은 눈인사를 교환했다.
“나무도마를 만드시나 봐요?”
“아, 네. 이제 오일만 바르면 완성이에요.”
그들 중 한 여자가 말했다.
정섭씨는 현장에서 오래 일했기에 나름 나무에 대해서 좀 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그래서 아는 척을 좀 하고 싶었다.
“딱 보니 오크나무네요. 단단해서 도마로 만들기에 딱 좋죠. 탁!탁!탁! 칼질하면 손맛도 크~~”
“오크나무는 맞는데, 오크나무를 칼질 도마로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올라왔는지 대구탕 사장이 정섭씨 뒤에 서 있었다.
정섭씨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예? 아니, 왜요? 지금 이거 도마 만드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도마 만드는 거. 근데, 칼질도마가 아니라, 플레이팅 도마로 쓸 거예요. 오크나무는 단단하지만 탄닌성분이 많아서 칼질하면 줄이 쫙쫙 그여서 보기 싫거든요.”
“뭐....뭐요? 플.....뭐?”
대구탕 사장이 살짝 웃었다.
“뭐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저쪽 자리에 앉으세요.”
대구탕 사장이 한쪽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섭씨는 그곳으로 걸어가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뭐하러 사람 쪽을 줘?
정섭씨가 풀썩 의자에 앉자, 대구탕 사장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오신 것을 보니 이제 때가 되었나 봅니다. 다들 오늘 여기 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 궁금한 것도 많을 거구요. 하지만, 저는 거기에 대한 대답을 지금 드릴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말을 여러분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바로 홍사장, 주경씨, 지연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정섭씨였다.
이들은 모두 꿈속에서 2층 공방의 창으로 봤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줘 소름 돋았던 현상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대구탕 사장은 이런 그들에게 2층 공방에서 만들던 도마를 마저 만들고 있으라고 했다.
조금 전 대구탕 사장의 말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고 서로 짐작했다.
“저기.... 허선생. 우리가 허선생의 말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홍사장이 물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내일 이곳에 오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내일....이요?”
주경씨가 물었다.
“네. 내일 여기에 와보세요.”
“그럼... 뭐가 있는데요?”
이번엔 지연씨였다.
“그건 와보면 알겠죠?”
대구탕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거 참! 그냥 말하면 될 텐데, 뭐 그게 어렵다고!”
정섭씨가 버럭했다. 하지만 대구탕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이만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라서요. 식사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저기.... 여기 오신 분들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저와 비슷한 경우라면... 우리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뭐라도 좀 말씀을....”
주경씨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러 가야 한다는 대구탕집 사장의 말에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도 점심식사 준비를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인데요?”
“사장님이 점심장사를 해서 얼마를 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벌어서 재벌이 될 것도 아니고, 그냥 이야기 좀 나누면 안 됩니까? 우리도 여기 손님이잖아요?”
정섭씨가 언성을 높였다.
“아,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돈을 버는 것.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저에게는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판매를 하는 그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한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단순한 금전적 보상과 비교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럼 돈은 못 벌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 하는 사람치고 돈 욕심 없는 사람 없던데?”
정섭씨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왜 이것이 아니라고 하면 저것이라고 생각을 하시는 거죠? 저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일을 하는 그것 자체로 행복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말이 돈을 못 벌어도 된다는 말로 해석이 되는 건가요?”
“...”
정섭씨가 조금 전 대구탕 가게 사장이 했던 말을 되짚어보자 분명 그렇게 말을 하긴 했다.
그런데, 돈보다 판매하는 행위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분명히?
그게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 가식적이잖아?
완전 재수 없어!
“그쪽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죠. 만약 돈을 벌지 못했다면, 내가 어떤 노동을 했더라도, 가치가 없는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정섭씨는 따져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엄숙하게 느껴져 입을 꾹 다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건부로 행복을 찾죠.”
“조건부.... 행복이요?”
“네. 그러니까 이런 거요. 사업이 번창하면 행복하겠다.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행복하겠다. 취업을 좋은 곳에 하면 행복하겠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겠다. 크고 넓은 집이 있으면 행복하겠다. 고급 차가 있으면 행복하겠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행복하겠다.”
대구탕 사장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빨개지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원하는 것을 얻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한때 원했던 것들은 없었나요? 그런데 그것으로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나요? 이 순간 원하는 것을 언젠가 얻으면, 그것 또한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처럼 가치가 없어지고, 행복한 마음도 사라지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걸 원하게 되고, 그 새로운 걸 얻으면 행복해지겠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
“행복해지세요. 지금 이 순간. 충분히 가졌어요. 여러분들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가졌어요. 행복을 계속 미루지 마세요. 지금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은 평생 행복할 수 없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만들던 도마는 오늘까지 다 만들어서 들고 가세요. 내일 가져가시진 못할 테니까요. 오늘은 얼마든지 공방을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대구탕 사장은 아리송하게 말을 남기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다들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다음 날.
홍사장은 점심시간이 되어 대구탕 매장으로 향했다.
다음날 오면 알 수 있을 거란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너무 궁금했다.
만약 오늘도 꿈에서 봤던 그 현상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어떻게라도 알아낼 생각이었다.
홍사장이 대구탕 매장 앞에 도착하니 어제 2층 공방에서 봤던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바깥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경씨, 지연씨, 정섭씨였다.
홍사장이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인사를 하니, 정섭씨가 홍사장에게 들어가 보라는 몸짓을 했다.
홍사장은 무슨 일이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어?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어서오세요?
뭔가 이상했다.
거기다 목소리도 평소 듣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홍사장이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니 어떤 아주머니 한 명이 서 있었다.
홍사장이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고 서 있자 그녀가 홍사장에게 물었다.
“안 들어오세요?”
“예? 아......예. 들어가야지요.”
홍사장이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혹시.....”
“뭐요?”
“여기 새로 일하러 오신 분.....”
“누구요? 저요?”
“네.”
“허이구. 참나. 오늘 다들 왜 이러실까? 나 여기서 언니하고 둘이서 장사한 지가 10년은 더 되었수다.”
“뭐, 뭐요?!!”
“오늘 도대체 뭣 때문인지 몰라도 다들 그쪽하고 똑같이 물어보고, 똑같이 놀라던데, 도대체 왜 그런 거유? 나도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
“지, 지금 농담하는 건 아니시죠?”
“뭐라구요? 아니, 당신들이야 말로 나한테 오늘 떼로 와서 장난치는 거 아니죠? 왜들 이래요? 누가 시켰어요? 아침부터 여기 와서 요상한 소리나 하라고?”
홍사장은 망치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홍사장의 표정과 밖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똑같았다.
홍사장도 그들의 곁으로 가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대구탕 간판을 보니, 간판은 그대로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가 도대체 뭘 본 거죠?”
주경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정섭씨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서 봤다. 분명 날짜는 그대로였다.
“다른 모든 곳의 시간은 그대로인데, 여기만 시간이 다르게 흘러버릴 수가 있나? 이 건물만?”
다들 이 기괴한 현상에 대해 저마다 나름의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이야기를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2층엔 올라가 봤소?”
홍사장의 말에 다들 경황이 없어 아직 2층에 올라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어제만 해도 깔끔했던 2층 테라스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무척 낡아 있었고, 오래되어 삭은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무성했다.
홍사장을 비롯한 일행들은 하루 만에 변해버린 테라스의 모습을 보고 입을 턱 벌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어떻게 이런 일이.....”
주경씨는 친구 선희와 앉았던 탁자와 의자에 다가갔다.
이젠 너무 낡아 앉으면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정섭씨는 2층 공방의 입구로 다가갔다.
현판이 삐딱하게 걸려 있었는데,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정섭씨가 먼지를 털어내려 훅 불자 먼지가 정섭씨 얼굴을 확 덮었다.
“에헤이! 켁! 켁!”
정섭씨는 먼지를 뒤집어 쓰고 콜록거렸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공기중으로 옅게 흩어지자 현판에 쓰인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시간을 달리는 공방
현판 앞에서 네 사람은 한동안 그 글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진짜..... 였나? 시간을 달린다는 게....”
지연씨가 나직이 읊었다.
끼이익.
정섭씨가 얼굴에 덮어쓴 먼지를 툭툭 털면서 공방의 낡은 문을 열었다.
공방에도 오랜 시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듯 먼지가 자욱 했고, 곳곳에 거미줄이 쳐 있었다.
오래된 공방에서는 신선한 나무 냄새가 아닌,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일행들이 공방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나무바닥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그들은 각자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공방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봤다.
오래된 창문.
꿈속에서 시계가 걸려 있었던 창문 위의 벽.
바로 어제까지 앉아 있었던 자리와 의자들.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쌓여있던 나무 자재들은 대부분 사용을 한 것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공방을 둘러보던 홍사장의 눈에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는 목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홍사장이 천천히 허리를 굽혀 목판을 집어 들었다.
뿌옇게 먼지가 앉은 그 목판에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앞부분은 먼지가 조금 덜 앉아 글을 볼 수 있었다.
- 타인의 시간....
어? 이건 저번에 봤던 건데?
홍사장은 얼마 전 공방에 왔을 때 쓰다만 글이 있는 목판이 생각났다.
먼지가 묻은 목판을 후~ 불려고 하다가 조금 전 정섭씨가 당한 일이 생각나, 그냥 옷 소매로 슥슥 닦았다.
모두 다 닦자 지난번 미완의 글이 마침내 완성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타인의 시간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시간만을 보려 하고, 다른 사람의 시간을 보기 위해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홍사장은 어제 대구탕 사장이 오늘 와보면 알게 될 거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홍사장은 그것을 어제 자신들이 모여 앉아 있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정섭씨, 주경씨, 지연씨 그리고 홍사장은 목판을 보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
.
.
.
.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공원묘지에 운구행렬이 지나갔다.
내리는 빗속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우산 없이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장례가 끝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모두 자리를 떠나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우산을 쓰지 않고, 계속 비를 맞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엔 정부장. 이제는 정사장이었다.
정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빗속에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가 앞에 세워진 묘비에 흐르는 빗물을 슥 닦았다.
홍.유.인. 묘비에 쓰인 글자.
홍사장의 무덤이었다.
눈물을 빗속에 섞어 흘리던 정사장이 홍사장의 이름 아래에 쓰인 묘비명을 보고선 피식 웃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나의 배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너무 놀라진 마라. 나처럼 죽을 수도 있으니까. 놀랄 시간에 행복해라. 이곳이 아닌, 그곳에 있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조건은 모두 갖췄으니.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묘비명을 되새기고, 되새기던 정사장은 마침내 묘비에서 등을 돌리고 빗속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홍사장의 마지막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 행복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행복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