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존재하는 걸까?
홍사장과 정 부장이 횟집에서 마주 앉았다.
홍사장은 공방 2층에서 꿈을 꾸고, 당장 정 부장을 만나러 달려왔다.
“지금 당장 나와!”
홍사장이 정 부장의 집 근처에 이르러 전화를 하자, 정 부장은 우물쭈물했다.
“어.... 사장님. 저기.. 제가 지금 일이 있어서...”
“회사도 안 나오는 놈이 일은 무슨 일!! 그럼 내가 집으로 쳐들어갈까?!”
“아, 아닙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홍사장이 당장 집으로 쳐들어올 기세로 윽박지르자 정 부장은 마지못해 홍사장을 만나러 나왔다.
홍사장과 정 부장의 술자리. 홍사장의 아내가 세상을 뜨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6년 만에 마주하는 술자리였다. 며칠 전부터 회사에 나가지 않는 정 부장은 가시방석이었다.
‘도대체 왜 찾아오신 거지? 설마.... 이번에 회사에서 입은 피해를 내가 손해배상해야 하는 건가?’
의외였다. 홍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올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홍사장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마지막 사직서를 건넸을 때의 반응을 봐서는 절대 연락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집 앞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찻집이 아닌 술집으로 불러냈다.
분명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 부장이 머리를 굴려봤을 때, 큰일은 얼마 전 우성과의 계약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이라면 자신에게 회사 피해를 물어내라는 것 밖에 없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정 부장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 과장의 실수라고 일러바치는 것도 치졸해 보였다.
‘나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지.’
홍사장과 정 부장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마 둘 다 술이 몇 순배는 돌아야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밑반찬과 소주가 먼저 나왔다. 홍사장은 소주를 들어 뚜껑을 열었다.
“제가 먼저 드리....”
“그냥 받아.”
정 부장이 술을 먼저 따르려고 했으나, 홍사장은 정 부장이 먼저 술을 받길 권했다.
정 부장은 홍사장이 따라주는 술을 먼저 받았고, 술병을 넘겨받아 홍사장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마셔.”
“아, 예.”
두 사람은 잔을 살짝 부딪치고 소주를 마셨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홍사장이 입을 열었다.
“정 부장...”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홍사장은 무슨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불쑥 책임지겠다는 정 부장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음?.... 뭐를?”
“제가 이번에 회사에 손실 나게 한 거.....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뭐?”
홍사장은 헛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지켜나 보자.
“그래? 그럼 정 부장이 뭘 어떻게 책임질 건데?”
“회사에서 난 손실만큼.... 제가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럴 돈은 있고?”
“집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내면 어느 정도는......”
“그럼 내일 회사로 와. 각서 써야지. 나중에 딴소리할 수도 있으니.”
“예....”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정 부장은 시무룩해졌다.
“그건 그렇고. 내가 사표 수리하지도 않았는데, 왜 정 부장 마음대로 회사를 안 나와?”
“...”
“회사가 무슨 애들 장난이야? 처음 입사할 때 죽기 살기로 하겠다 마음을 먹었으면, 죽어도 회사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일을 해야지!”
“.... 죄송합니다....”
“진짜 그만둘 거야?”
정 부장은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흠.... 그래. 알겠어. 어쨌든 내일 회사에는 나와. 알겠어?”
“네..”
아쉬웠다.
솔직히 홍사장이 집 앞에까지 찾아왔다고 하기에 회사로 돌아와 달라는 말을 하러 오진 않았을까? 하는 기대로 조금은 했었다.
그렇다면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못 이기는 척 회사로 돌아갈 마음도 있었다.
그럼 그렇지... 홍사장이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정 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주문하신 고급회 나왔습니다~”
주문한 회가 나왔다. 정 부장은 흠칫 놀랐다.
“고급회... 요?”
“네.”
“혹시 주문이 잘못.....”
“음... 어? 여기 맞는데요?”
횟집 직원이 주문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말했다.
홍사장이 주문을 했기에, 정 부장이 홍사장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기.... 이분은 고급회를 절대 주문하실 분이 아닌데...”
“야!”
홍사장이 정 부장을 노려보며 소리지르자 정 부장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냥 놔두고 가세요. 제가 주문한 거 맞습니다.”
홍사장이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회를 놔두고 갔다.
“휴우.... 내가 암으로 죽기 전에, 너 때문에 혈압으로 죽겠다.”
기분이 묘했다. 아직 자식들도 모르고, 병원을 고소하기 위해 말했던 황변호사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암에 대한 이야기를 정 부장에게 이렇게 털어놓게 되다니.
“예?... 그게 무슨.... 사장님 설마.... 혈압 있으세요?”
홍사장은 어이가 없어 입을 턱 벌렸다.
아~ 이 새끼....
“안주 나왔는데... 그냥 술이나 마셔.”
“예?... 아, 예.”
둘은 술잔을 비웠다.
정 부장은 오늘따라 홍사장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집까지 찾아온 것도 그렇고, 횟집에서 일반회와 고급회 중에 절대 고급회는 시키지 않는 사람이 고급회를 주문한 것도 그랬다.
홍사장은 고급회라고 붙여놓은 것 자체가 문제라며 지적하곤 했었다.
“그럼 고급회 아닌 회는 저급회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붙여놨는지... 쯧쯔.... 그냥 비싼 거 먹으라는 말이잖아? 어차피 똑같은 건데.”
정 부장은 불편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홍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홍사장은 젓가락을 들더니 머뭇머뭇거리며 회가 아닌 밑반찬 쪽으로 향했다. 머지? 평소 안 시키던 고급회를 시키더니 부담스러우신가?
홍사장은 의사가 날음식은 피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 젓가락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다가 홍사장은 피식 웃었다.
술도 피하라고 했는데, 술은 술술 마시면서 날음식을 못 먹을 건 뭐람? 곧 죽을 거면서.
홍사장은 술을 몇 잔 마신 후 작심한 듯 회를 푹 떠서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입에 텁썩 물었다.
그리고 쿰척쿰척 맛있게 씹었다. 그제야 정 부장도 조금은 불편한 마음을 풀고 회를 먹었다.
홍사장은 정 부장과 마주하며 술을 마시면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선고받고, 삶의 끝을 정리하며, 인생의 마지막 술이라고 생각하는 자리를 정 부장과 둘이서 하게 될 줄이야..
홍사장은 정 부장과 술자리를 어디서 할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정 부장은 회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횟집으로 정했고, 이왕이면 마지막이니만큼 좋은 걸 먹이고 싶었다.
물론, 고급회라는 것이 상술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여전했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미웠다. 정 부장이 일하는 것을 보면. 조금만 더 일머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리고 짠했다.
그렇게 일머리도 없는 놈이 어떻게든 일을 해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이런 놈도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직장에서 늘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악착같이 일하는 것을 보면... 바퀴벌레보다 더 독한 놈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지독한 놈....”
“예?”
“아니다. 그냥 마셔.”
“아... 예....”
정 부장은 홍사장에게 여러 가지로 섭섭할 때도 많았지만,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특히나 홍사장이 아내가 죽은 이후로 사람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삭막해져 가는 모습에서 많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정 부장은 홍사장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지만, 홍사장은 그만큼 더 멀리 떨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홍사장이 안타까워 보이는 건 여전했다.
자신에게 거래처에서 피해를 입은 일에 대해 책임지라고 전화만으로 이야기를 해도 될 텐데, 옛정이 있어 일부러 술을 한 잔 받아주시는구나, 그러면서도 마음에 담은 표현은 못해 저렇게 퉁명스럽게 행동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에 정 부장의 마음이 찡했다.
거기다..... 무려 고급회까지?
정 부장이 피식 웃었다.
“뭐야? 너 왜 웃어?”
“아니...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데? 어서 말해봐.”
소주 2병째. 홍사장도, 정 부장도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음.... 좋아서요.”
“뭐가?”
“사장님과 이렇게 술을 마신다는 게.”
“좋긴... 개뿔.... 만날 나한테 싫은 소리만 듣는 놈이! 그래서 회사도 그만두겠다는 놈이 좋긴 뭐가 좋아?!”
“그렇게 싫은 소리도 하시고..... 회사도 그만두겠다는 놈한테... 회를 사주시잖아요... 무려 고급회를...”
“헛헛.... 회 두 번 사줬다간 때려도 좋아하겠다?”
“이미 자주 때리셨는데요... 헤헤...”
홍사장은 뜨끔했다.
맞다.
툭하면 정 부장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게 예사였다.
홍사장의 눈길은 저절로 테이블 아래 정 부장의 다리로 향했다.
여름으로 치닫고 있는 6월.
정 부장이 칠부바지를 입고 나와서 정강이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수많은 흉터들과 최근에 생긴 멍 자국.
회사에선 늘 긴바지만 입고 있어서 볼 수 없었던 정 부장의 정강이를 보자 홍사장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 수많은 흉터들이 누구의 작품인지 본인이 가장 잘 알았기에.
“야. 정 부장.”
“예?”
“너 인마.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나 고소할 생각은 안 해봤냐?”
“안 해봤겠어요?”
밉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애증이 넘치는 홍사장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술기운도 제법 올랐고, 어차피 이제 회사도 안 다닌다 생각하니까 농담도 편하게 나왔다.
“어쭈?”
“근데, 그러면 회사가 어려워질 수도 있잖아요. 제 직장인데... 회사가 사장님 살린 겁니다.”
“아~ 그래? 그럼 이제 회사도 그만뒀겠다. 나 고소할 수도 있겠네?”
“음....”
정 부장이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하더니 씩 웃었다.
“아뇨.”
“왜?”
“거기에 저만 있나요... 심대리, 고 과장, 윤지 씨..... 다들 거기가 직장인데...”
정 부장이 누구보다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홍사장은 마음이 뭉클했다.
어쩜 이놈은 회사 주인인 나보다 회사를 더 아끼는 거 같을까?
“그런 놈이 회사를 그만둬?”
“사장님 때문이죠 뭐..... 이래도 사장님은... 저한테 다시 오라는 말씀은 안 하시잖아요?”
정 부장은 일말의 희망을 담아 속내를 털어놓았다.
“회사로 와.”
“정말요?”
정 부장이 반색했다.
“그래. 아까 말했잖아. 내일 각서 쓰러 오라고.”
정 부장은 다시 풀이 죽었다.
“너무해....”
“술이나 마셔 인마.”
술병이 또 한 병 늘어나고, 둘은 점점 더 취했다.
“그래도... 좋네요...”
“뭐가?”
“사장님하고 아니, 이제 그만뒀으니까 형님이라고 하겠습니다.”
“뭐? 형님?”
“그래요. 홍. 유. 인. 형님. 왜요? 회사도 안 다니는데... 사장님 소리 듣고 싶어요?”
“하..... 됐다. 그래. 그냥 편하게 불러라. 어쨌든... 뭐가 좋은데?”
“이제... 편하게 술 한잔 마실 수 있다는 거요?”
“언제는 불편하게 마셨냐?”
“그게 아니라... 형님 하고요... 홍. 유. 인. 형님 하고요...”
홍사장은 피식 웃었다.
정말 오래되었다.
아내가 죽고 난 이후로 처음 갖는 정 부장과의 술자리.
“시장니.. 아니, 형님. 이제... 또 이런 자리는 없겠죠? 내일 각서 쓰고 나면... 저 보러 안 오실 거죠?”
“그래.... 뭐 그래도 앞으로 한, 두 달은 볼 수도 있겠지? 이런 술자리는 못하겠지만.”
홍사장은 죽기 전 오늘 마시는 술이 마지막이라고 마음먹었기에 이렇게 말했다.
“한.. 두 달이요? 그럼... 그 뒤에는요?”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다.”
“너무해! 형님... 정말 너무해.....”
갑자기 정 부장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야... 정 부장... 사람 사는 거 다 시절인연이야. 인연이 돼서 만나고, 때 되면 헤어지고, 또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지 뭐, 별거 있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모님이셨다면 그렇게 말씀 안 하셨을 텐데.... 업!! 죄, 죄송합니다!”
정 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홍사장의 아내가 생각나 말했는데, 깜짝 놀라서 얼른 입을 틀어막으며 사과했다.
“괜찮아.. 말해도 괜찮아.. 벌써 오래됐는데 뭐...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홍사장은 정말 이젠 괜찮았다. 만날 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 그래요?... 사실 그동안 사모님 이야기하고 싶어도 조심스러워서.....”
“조심스러워?.. 정 부장이?... 허이고....... 근데, 나한텐 형님이라고 하면서 왜 사모님이야? 형수님이라고 하지?”
“음..... 형수... 아, 안 돼요. 형님은 되는데, 사모님은... 그냥 사모님..”
“....”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리웠는데.... 이제 그만두니까 더 그립네요.....”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매운탕 먹을 거지?”
어느새 회 한 접시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회를 먹고 나서 먹는 매운탕. 너무나 당연한 절차였으나, 정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사장님.”
“어? 뭐라고? 안 먹어? 진짜?!”
“오늘 술자리가 마지막이라면서요.”
“그렇겠지.. 술자리는.”
“그럼 당연히.... 노래방이죠!”
“뭐? 노래방?”
“그래요. 사모님이 여기 계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맞다.
정 부장의 말처럼, 홍사장의 아내는 회식을 할 때, 흥이 오르면 어울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사모님이 부르는 시간.... 듣고 싶다. 사모님이 진짜 그 노래 좋아하셨잖아요.... 사장님은 노래방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홍사장이 피식 웃었다.
정 부장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이 재밌어 보여 웃었고, 정 부장이 모르고 있는 게 있어서 또 웃었다.
“가요! 형님! 노래방은 제가 쏩니다!”
“여기는?”
“.... 예?...”
“여기도 내가 산다고 한 적은 없는데?”
“.... 어.... 그게..”
정 부장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자, 홍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인마. 이제 집 담보로 빚까지 내야 할 놈이 무슨...”
홍사장의 말에 정 부장이 뾰로통했다.
“앞장서.”
“뭐를요?”
“노래방 가자며.”
“정말요? 정말 가시려고요??”
정 부장은 회사 회식 때에도 노래방에 가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다가, 직원들이나 사모님이 수차례 권하면 마지못해 한 곡 부르던 홍사장이 정말 노래방에 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럼. 안 갈래?”
“아니요! 가야죠! 얼른 가요!”
조금 전까지 뚱해 있던 정 부장은 금세 기분이 들떠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참 단순했다.
사람이.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싫었다.
단순함과 순수함은 때론 홍사장을 흐뭇하게 했고, 때론 홍사장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사장님. 이쪽이요.”
정 부장이 앞장서 걸었다. 휘적휘적 보무도 당당한 정 부장의 모습.
“정 부장 동네에 오니 걸음걸이부터가 다르네?”
“당연하죠. 헤헤. 그런 말도 있잖아요. 똥개도 자기 동네에서는 오십 프로 먹고 들어간다.”
“뭐? 그런 말이 있어?”
“그럼요. 아, 참고로 저는 팔십 프로 먹고 들어갑니다. 여기 토박이거든요. 자, 얼른 가요!”
정 부장은 자주 가는 곳인지 당당하게 한 단란주점으로 들어갔다.
단란주점의 주인이 반갑게 정 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안내했다. 맥주 몇 병과 마른안주를 주문하고 정 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사장님 먼저 노래한곡.... 을 권하고 싶으나! 분명히 또 너부터 노래하라고 말씀하실게 뻔한 관계로~~ 저부터 한 곳 뽑아 올리겠습니다!!”
“그래. 잘 아네.”
정 부장은 노래방 기계에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는 시작 버튼을 누르기 전에 넥타이가 없는 걸 아쉬워하며 휴지를 풀어 머리에도 두르고, 목에도 감았다.
“야. 정 부장.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에이~~ 사장님은.... 꼭 노래방에서도 샌님처럼 놀려고...”
“뭐 인마?”
정 부장은 대꾸하지 않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글자가 뜨면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맞춰 정 부장이 통통한 몸을 공이 튀기듯 통통 튀며 춤을 췄다.
어젯밤 이야기 / 소방차
“어젯밤에 난 네가 미워졌어! 어젯밤에 난 네가 싫어졌어!!”
미워졌어 와 싫어졌어에 유독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네가’라는 가사에 맞춰 홍사장을 향해 삿대질을 하듯 손가락을 쭉쭉 찔러댔다.
“저, 저놈시키가!...... 어휴....”
홍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정 부장은 토라지듯 홱 돌아서며 엉덩이를 좌우로 실룩실룩 움직였다.
나풀나풀거리는 휴지의 하늘거림과 정 부장의 흐느적거림이 참 잘 어우러졌다.
때때로 홍사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전곡을 완창 한 정 부장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노래가 끝나자 홍사장이 박수를 쳤다.
“이야.... 소방차 처음 나왔을 때, 정원관처럼 통통한 가수가 춤추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정 부장 추는 거 보니까 그건 애교 수준이었구먼.”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애매한 말에 정 부장이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장니.. 아니, 형님. 전에도 그런 비슷한 말씀 하셨거든요?”
“내가? 그랬었나?”
“통통 튀어 다니는 게, 프라이팬 위에 칼집 안 낸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터지는 것 같다고.”
홍사장은 순간 뜨끔하면서 무안한 마음에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허험! 자, 나도 노래 한 곡 해야지!”
“예? 아니, 어쩐 일로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노래를......”
“이봐. 정 부장. 자네는 우리 집사람이 시간이라는 노래를 좋아해서 많이 부른 줄 알지만, 사실 그거 내가 연애할 때 18번이었어.”
“뭐라고요?”
“내가 그 노랠 좋아하니까... 그런데 부하직원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고... 뻘쭘해하면서 노래를 안 하려고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대신 불러준 거라고.”
홍사장의 말에 정 부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홍사장이 시작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제목과 가수 이름이 나왔다.
시간 / 김도향
홍사장은 오늘 만큼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뻘쭘해하지 않으며 죽기 전 마지막으로 노래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는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정부장만 있었다.
“나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난 어디로~ 돌아갈까.....”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홍사장의 모습을 정 부장은 가만히 지켜봤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홍사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술에 취해.
음에 취해.
노랫말에 취해.
시간... 정말...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간이 허락된다면... 언제를 선택하게 될까? 아내가 건강할 때로? 처음으로 회사 제품이 수출 나갔을 때? 회사를 처음 차렸을 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를 처음 만난 날? 군대를 갓 전역했을 때? 어머니 품에 안겨 잠이 들던 어린 시절로?... 그런데.. 지나온 그 많은 시간들 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는가...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나... 돌이켜 보니.. 모든 날이 좋았다. 좋아서 좋았고, 나빠서 좋았다. 기뻐서 좋았고, 아파서 좋았다. 수월해서 좋았고, 어려워서 좋았다. 나쁨도, 아픔도, 어려움도.... 그러한 순간 또한 인생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젠 알 수 있었기에.
“가~슴 한편 숨어있는 후~~ 회도~ 내가~ 흘러갈~ 세월~이 가려~ 주~겠지~”
시간의 마지막 부분을 흐르는 홍사장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이~ 참. 주책맞게 이게 뭐하느.....”
“흐어엉!!!”
홍사장이 불쑥 흘려버린 눈물에 쑥스러워하는데, 갑자기 정 부장이 울음을 터트렸다.
“뭐, 뭐야? 왜 이래? 정 부장! 왜 울어?”
“흑.... 모르겠어요.”
“뭐? 울고 있는데, 우는지를 왜 몰라?”
“그냥.... 형님 노래가 슬프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구슬프기도 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해요. 그리고....”
홍사장은 자리에 앉으며 목이 타는지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형님이.... 노래를 부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것 같은 기분?”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글쎄요...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죠. 기분이.”
“그래... 기분도 그런데... 노래 한 곡 안 해?”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요.”
“그래. 그럼.”
정 부장과 홍사장은 잠시 노래를 멈추고, 말도 멈췄다.
두 중장년의 남성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앉아 있는 어색한 방에는 코 훌쩍이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홍사장은 눈물을 흘리는 정 부장을 보며 평소 자신이 즐겨하던 스티브잡스의 명언이 또 생각났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인생에서 큰 결정을 할 때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당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건 우리가 아직 잃을 게 많다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다.
홍사장은 내일 자신이 하게 될 결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다행이었다.
큰 결정을 앞두고 죽음이라는 도구가 도와줘서. 홍사장이 씩 웃으며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두 사람의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