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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건우 Sep 08. 2024

꽃다발

첫 선물

 - 쿠르릉!!  

  

“왁!!”     


정섭 씨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벌떡 깼다.     


“하아.... 후우.....”     


정섭 씨는 놀란 마음에 숨을 헐떡였다. 


그가 놀란 건 천둥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들. 


장인어른의 발인도 지키지 못하고, 보험금 내놓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모습. 


애써 잊으려고 했던 그 장면을 마치 TV를 보듯 다시 보고 나니 자신이 놓쳤던 장면까지 모두 보게 되어 미칠 듯이 괴로웠다.      


죽어버릴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짐승 같았던 아니, 짐승만도 못했던 자신의 행동에.    

 

근데 이제 와서? 

    

죽으려면 그때 죽었어야 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는데, 그때의 부끄러움으로 지금 죽는다는 건 너무 시간에 어울리지 않았다.     


보고 싶다.     


그 시절 여관방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누워있던 장면을 보고 나니 아내와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그 시절 전혀 행복하다 느끼지 못했던 자신에게, 아내가 너무 행복하다 말했던 그 의미를 이젠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근데 이제야?   

  

 조금 더 일찍 찾았어야 했다. 


아내와 아들을. 


물론, 조금 더 일찍 찾아갔다고 해서 아내와 아들이 자신을 만나줬을지 아니었을지는 몰랐지만, 홀로서기 힘들었을 아내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너무나 컸을 어린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일찍 찾아갔어야만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고.... 죽을까? 아니야. 그냥 지금 이렇게 살았던 것처럼 살자. 그래도 꼭 한번 보고 싶기는 한데... 만날까? 아니, 아니. 만나고 나서 꼭 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염치없는 짓은 아닐까? 그놈의 염치! 있어서 이렇게 살았냐? 그래도 죽기 전에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 씨바! 모르겠다!! 모르겠어!!'     


 정섭 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비가 내리는 저녁 불이 꺼진 공방은 무척 어두웠다. 


어둠을 헤치며 공방의 나무에 툭툭 부딪치면서 공방에서 나왔다.      


-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원했다. 


2층 계단 앞에서 1층을 내려다보니 대구탕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저녁이라 그런지 하얀 간판의 불이 더욱 밝게 느껴졌다. 


대구탕 가게에는 브레이크타임이 끝나고 저녁 손님들로 분주했다. 


정섭 씨는 대구탕 매장의 꿀막걸리가 생각나서 왔지만 발길이 그곳으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SUV 차량에서 가족들이 내렸다. 


아빠, 엄마, 아이 둘,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엄마는 우산을 쓰고 매장으로 들어갔고, 아빠와 아이 둘은 비를 피해 뛰어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탕 매장에서 들려오는 하하호호 웃음소리.   

   

정섭 씨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정섭 씨의 얼굴에 떨어졌다.  

   

 저들은 저렇게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난 이렇게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평소 같았다면.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내와 나의 아들은 하필이면 불행한 나를 만나 불행하게 되었을까?


 저렇게 행복할 수 있는 가정에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정섭 씨는 안타까웠다. 


아내와 아들이. 


자신의 인생이야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들로 마땅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아내와 아들의 잘못이라면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대구탕 가게를 정섭 씨는 멍하니 비를 맞으며 쳐다봤다. 


브레이크 타임은 끝이 났지만, 밝고 환한 대구탕 가게로, 행복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정섭 씨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대구탕 가게는 산에 있어서 산속에 난 도로를 따라 힘없이 걸어 내려갔다. 


비를 맞으며 걸어 내려가는 정섭 씨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한참을 걸었다.


 비를 맞으며. 


산에서 다 내려와 차들이 다니고, 버스와, 전철이 다니는 곳까지 내려와서도 그냥 걸었다.


 터벅터벅. 


몇 시간을 그렇게 걸어가던 정섭 씨는 초조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짧은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길가에서 무언가를 사서 품속에 감췄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 아파트 단지 앞에서 정섭 씨는 담배를 꺼냈다. 


담배도 제법 축축해져 있었지만, 불이 붙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후우~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빗속으로 하늘하늘 사라지는 뿌연 연기. 


연기는 참 좋겠다.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어서. 


담배를 연속으로 두 개비나 피우고 아파트 단지 속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한 여인이 우산을 쓰고 걸어왔다. 


아내 아니, 전 아내. 


그러니까 정섭 씨의 전 부인이었던 미정 씨. 


그녀가 우산을 쓰고 정섭 씨를 향해 걸어왔다. 


정섭 씨는 뒷짐을 지고 서서 물끄러미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쳐다봤다.      


“오랜.... 만이네?”     


정섭 씨가 자신의 앞에 와서 선 미정 씨를 보고 어색하게 말했다.


 미정 씨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마치 정섭 씨가 비를 쫄딱 맞고 왔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 수건이 들려 있었다. 


정섭 씨는 물끄러미 그 수건을 쳐다봤다. 


이 여자는 어떻게 내가 하는 행동을 보지도 않고 모두 다 알까? 


여관에서 함께 살 때도 늘 느꼈던 거다.     


“닦아.”   

  

“응?.... 어.”     


 정섭 씨가 수건을 건네받아 비에 젖은 머리를 닦았다. 


순간 수건에서 밀려오는 향기. 


그것이 어떤 종류의 세제인지는 몰랐지만, 아내와 함께 여관방을 전전하며 살 때, 늘 맡았던 그 냄새가 수건에서 퍼져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모든 것들이 아련해지며 그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향기에 스며있는 시절의 추억. 


아내와 함께 여관방에 짐을 들이던 일, 조리할 도구가 변변치 못해 가스버너를 두 개나 사서 하나는 국을 끓이고, 하나는 생선을 굽던 일, 아내가 임신을 한 몸으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여관방 3층을 오르내리던 일, 아들이 태어나고, 그 비좁은 공간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일. 


당시 정섭 씨에겐 그런 모든 일들이 못마땅하고, 불편하고,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날들이었는데, 수건으로 그때의 향기를 맡은 지금의 정섭 씨에게 그 시절은 사무치도록 그리운 날들이 되어버렸다.

     

코끝이 찡해졌다. 


정섭 씨는 얼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척 표정을 가렸다. 


다행이었다. 


비가 내려서.      


“잘... 지냈어?”     


 오랫동안 얼굴을 닦고, 그렇게 닦는 동안 묵묵히 기다려준 아내에게 정섭 씨가 물었다. 


미정 씨는 대답은 하지 않고 정섭 씨의 눈을 쳐다보았다.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면서까지 집에서 뛰쳐나와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이혼을 한 여자에게 그것이 물을 말이냐는 듯.   

  

“장모... 아니, 어머님 하고 처제는?”    

 

 정섭 씨는 빤히 쳐다보는 아내에게 민망해 눈빛을 피하며 물었다. 


더는 장모가 아니었기에, 얼른 말을 수습했다.     


“당신 만나러 가지 말라고 하던데?”     


“뭐?! 아니, 나 만나러 나온다고 말했어?! 왜?!”     


정섭 씨는 그녀들이 자신을 벌레보다 더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만나러 가니까 만나러 간다고 한 거지! 내가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와야 해?”     


“...”     


정섭 씨는 닦던 수건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그냥 들고 가. 또 비 맞으면서 갈 것 같은데.”     


정섭 씨는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손으로 수건을 꼭 쥐었다.      


“뭐라고 하셔?”     


“뭐가?”    

 

“장.. 어머님이 뭐라고 하셨냐고? 나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나가지 말라고 하지! 미친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지 아냐고!”     


“.... 그랬구나.... 그런데 왜 나왔어?”     


“내가 언제 엄마 말 들었어? 그랬으면 당신하고 결혼도 안 했지.”     


아내 아니, 전 아내의 말에 정섭 씨는 피식 웃었다.      


“나와줘서 고마워. 이거...”     


정섭 씨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순간 미정 씨는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정섭 씨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미정 씨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자. 받아.”  

   

정섭 씨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꽃다발이었다.   

   

“이게.... 뭐야?”     


“뭐긴.. 자기 좋아하는 꽃이잖아. 오는 길에 꽃집이 없어서 편의점 앞 자판기에서 샀어. 비록 조화이긴 하지만..... 자기가 좋아할 것 같아서.”     

 

미정 씨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정섭 씨로부터 꽃을 건네받았다. 


순간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 


그 짧은 온기.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서로의 따스함인가.    

 

“며칠 전 아빠 납골당에 다녀왔어.”  

   

정섭 씨는 뜨끔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었기에.     


“거기 가는 길에 이렇게 적혀 있더라.”     


“뭐...라고?”     


“조화는 그냥 플라스틱 쓰레기라고.”    

 

정섭 씨의 얼굴이 순간 화끈거렸다.     


“... 어?.. 어... 그러니까.. 그게....”     


정섭 씨는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버벅거렸다. 


아, 씨. 조금 더 발품을 팔아서 생화를 사 왔어야 했나? 


그런데 이 시간에 파는 곳이 있었을까?    

 

“근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조화를 만드는데도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가잖아? 그렇게 정성이 들어간 물건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건 너무 무례한 일인 것 같아.” 

    

아내의 말에 정섭 씨는 그래서 지금 이 꽃다발이 어떻다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고마워.... 처음이네? 당신한테서 꽃다발도 다 받아보고... 당신 아는 형인가? 그 사람이 꽃으로 맞을 뻔했다면서 꽃다발 한 번도 안 사 왔잖아.”    

 

 부끄러웠다. 


아는 형의 이야기를 그렇게 써먹을 필요는 없었는데.   

  

 현장에서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정섭 씨에게 함께 일하던 형 한 사람이 말했다. 


결혼기념일이라 꽃을 선물했는데, 아내가 다음부턴 돈으로 들고 오라고, 꽃 사들고 오면 꽃으로 맞을 줄 알라고 했다고.


 여자들은 무조건 꽃보단 돈이라고. 


그래서 아내에게도 꽃을 선물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꽃 대신 돈을 이벤트처럼 건넸던 적도 없었다. 


그냥 준 것이 없었다. 


그 형의 경험을 빌미로 꽃 선물을 하지 않았을 뿐.

     

“그래도 난 꽃이 좋은데.”     


“아직 니가 어려서 그래. 세상을 몰라서. 돈이 최고지!”     


당시 아내의 말에 정섭 씨는 언제나 돈. 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꽃은 왜?”     


“.... 그냥.. 걷는데, 꽃이 눈에 띄어서....”    

 

 정섭 씨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여행을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바로 이것이었었다.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지만 해주지 않았던 것. 


소박하지만 그 어떤 화려하고 호화로운 것들보다 진심이 담겨 있는 것. 


이 꽃다발 하나를, 비로소 떠날 결심을 하자 꼭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무나 큰 비용이 들거나,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하지 않은 일이었다.     


“용건은?”  

  

“.... 용건?....”     


“그래. 당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시간에 나를 이렇게 찾아왔을 이유는 없잖아.”     


아내의 말에 정섭 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구나. 


지금까지 아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용건? 


용건은 없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고, 그래서 비를 맞으며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그것이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용건이 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용건이 보고 싶었다.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 저기.... 그게....”     


“...?....”     


마땅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은 정섭 씨는 궁색한 질문을 던졌다.     


“아, 그... 아버님 보험금 말이야...”    

 

 정섭 씨의 말에 아내의 표정이 금세 싸늘하게 바뀌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네가 인간이니?라는 표정. 


혐오와 경멸의 표정이 아내의 얼굴에 나타났다.     


“아! 진짜 저어어엉~~말 오해하지 마! 난 그 보험금 아무런 생각도 없어! 진짜! 진짜야!”   

  

아내의 변하는 표정을 보며 정섭 씨는 본인이 꺼낸 이야기에 스스로도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뭔데? 그걸 왜 묻는 건데?”      


“아니.... 그러니까 아버님 돌아가시고... 보험금으로 말이야.... 더 크고, 더 좋은 집으로 얼마든지 이사를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직까지 여기 이렇게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휴우.....”     


미정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섭 씨를 딱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왜? 여기 집이 어때서?”     


“.....”     


 정섭 씨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 


그렇다고 해서 안 좋은 아파트라고 말하기엔 본인 스스로는 여관방을 전전하는 처지라 말하기가 좀 그렇고..... 참 애매했다.  

    

“더 크고,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행복해지니?”     


미정 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한텐.... 아무리 크고, 넓고, 좋은 집도... 당신하고 명현이하고 함께 지냈던 그 여관방 한 칸 보다 못해.”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의 말을. 


그런데 지금 아내가 건넨 수건을 한 손에 들고, 비를 맞으며 듣는 이 순간에,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섭 씨는 너무나도 사무치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미... 안 해.”     


정섭 씨의 목소리도 떨렸다.    

 

미정 씨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섭 씨는 미정 씨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아 손에 쥐고 있는 수건만 더욱 힘주어 꽉 쥐었다.   

  

“갈게.”     


정섭 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뭐?.. 오늘 왜 왔는데? 용건이 있을 거 아니야?”    

 

“용건은 무슨.... 그냥 왔다니까.”     


정섭 씨의 말에 미정 씨는 불안이 엄습했다. 


이렇게 꽃만 건네기 위해 올 사람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잘.... 지내.”     


 정섭 씨가 돌아섰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빠르게 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걸었다. 


빗속을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에서 미정 씨가 외쳤다.  

   

“살아!!”   

  

정섭 씨가 걸음을 멈췄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쏴아아아     


세차게 비가 쏟아졌다.    

 

“세상 어디에 있든, 살아! 비겁하게 도망치려 하지 말고! 당신은....”  

   

미정 씨가 울먹였다.   

  

“당신은... 나하고 명현이한테는.... 하늘이니까!!...... 폭풍이 몰아치고, 비바람이 쏟아지는 지랄 맞은 하늘이라도.. 하늘이니까! 그러니까...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아!.. 하늘이 없는 세상은 없잖아.... 그 하늘마저 없앤다면 당신은.... 정말.. 나하고, 명현이한테 지금까지 잘못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거야!”   

  

뒤돌아 서 있는 정섭 씨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수건에서 아내의 냄새가 났다. 


좁디좁은 세 사람의 여관방 냄새가 났다. 


수년 만에 만났어도, 우산을 안 쓰고 왔을 거란 걸 알고 수건을 들고 나온 아내였다. 


정섭 씨의 수상한 행동에, 아내는 그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도 알아채고 말았다. 


정말 못났다. 


나란 인간은. 


끝까지 아내에게 실망만.......  

    

아내의 마지막 말이 정섭 씨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실수투성이 인생이었다. 


아내와 아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 보다 더 큰 잘못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이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것이 더 큰 잘못이라 말하고 있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미정 씨는 우산을 쓴 채로, 정섭 씨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은 채로 서로 거리를 두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뒤돌아선 정섭 씨의 어깨는 한없이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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