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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k-book 글로벌 서점에 관한 고찰

#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by 서점원


6월

05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식당에 ‘재료가 소진되어 일찍 마감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듯, 서점도 ‘도서가 소진되어 일찍 마감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을 수 있을까? 혹은 한글을 읽을 줄 몰라도 외국인 관광객이 들러서 책을 구경하는 서점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 사실 전자는 그 어떤 서점도 평생 붙일 수 없는 안내문일 테지만, 후자는 나름 가능할 법도 하다.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 싶었던 건 한 손님 덕분이었다. 처음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근처 대학생이라 생각했다. 차분히 책을 고르던 여성은 책을 내밀며 현금으로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서점 도장도 찍어주고, 기억에 남는 문장 등을 기록할 수 있는 스탬프를 설명하며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러니까 소통이 되는 대화를 했다. 너무 신기한 나머지 소개팅에 나간 사람처럼 질문 폭격을 쏟아냈다. 그녀는 홍콩에서 왔는데 한국을 여행 중이며, 한국어는 7년 전부터 배웠다고. 독학인가 싶어 물었더니 학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들었고, 한국 문화를 좋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아니, 일단 듣기와 말하기가 되어 원어민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라니. 게다가 책을 구입한다는 건 읽기까지 된다는 거다. 맙소사.


무엇보다도 발음과 억양이 정말 자연스러워서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물론 나도 쉬운 단어를 골라 말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막힘없이 소통이 이루어졌다. 그녀가 독학은 아니고 학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들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홍콩인이 있다면 그 학원을 적극 추천할 것이다. 진심으로! 이질감 없는 톤, 시원하게 뚫린 귀와 입. 외국어를 배우는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을 다 충족하는 학생을 배출해 낸 곳이 아닌가.


계산을 끝마친 그분은 서점의 영업시간을 물었고, 원래는 일곱 시까지인데 마침 그날은 수요일, 글쓰기 클럽이 있어 7시 20분 정도까지는 시간이 있다고 했다. 학생은 창가 앞 원형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책은 문지혁 작가의 ⟪초급 한국어⟫.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의 이야기인데 이분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책이라 그것조차 너무 귀여웠다.

사실 그녀의 한국어 실력은 초급이 아니라서 나는 ⟪초급 한국어⟫의 2권에 해당하는 ⟪중급 한국어⟫를 권하며 하이클래스 조크를 던져볼까 싶었지만, 일단 잘 참아냈다.


작고 조그만 홍콩 학생은 스무 살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가 관광지도 아닌 이곳의 동네서점을 찾아온다는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나도 일본 여행 중에 츠타야 서점 같은 대형 서점도 방문했지만, 중심가가 아닌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동네 어디쯤 위치한 독립서점을 찾아 구경하고 다녔는데 (심지어 일본어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만 읽을 줄 아는데 그마저도 일본어 서적은 아이들을 위한 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자라 나는 까막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반면에 이 학생은 대화까지 거의 네이티브급으로 해내는지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까막눈인 나도 외국에 가면 동네서점을 한 번쯤은 방문하는데 이 학생에겐 당연한 코스일거라고 바로 이해했다.


외국인이 서점에 와서 책을 읽는다는 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연인이나 친구가 외국인이라면 따라서 올 수도 있겠지만, 진짜 책을 읽고 사기 위해 서점을 온다? 게다가 한글을 읽을 줄 안다? 정말 케이팝이 어마어마하군 싶은 순간이었다. 동시에 케이북(k-book) 열풍이 불 수도 있으니,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외국인을 위한 책 큐레이션도 있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내가 불어를 배우고 있는데 프랑스 소설에 한국어를 배우는 주인공이 나오면 흥미롭긴 할 테니까.


오늘도 나의 좁은 시야를 반성하며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책을 입고하려 한다. 언어는 달라도 우린 책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발견했으니.


2025년 6월 18일 수요일 글로벌 서점이라는 야망이 생긴 작고 소중한 동네 서점에서




서점원의 문장과 책

: 안녕하세요? Annyeonghaseyo? - Are you in peace?

안녕히 계세요. Annyeonghi Gyeseyo. - Stay in peace.

안녕히 가세요. Annyeonghi Gaseyo. - Go in peace.


⟪초급 한국어⟫, 문지혁 지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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