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by 서점원

6월

04


‘무엇이든’ 해야겠다 마음 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책방 지원사업이었다. 그중 눈에 들어온 것은 서울도서관이 2019년부터 시작한 서울형책방. 서울시 내 동네책방 50여 곳을 선정해 문화 활동을 지원해 왔는데 작년 일정을 보니 5월이면 이미 모집 공고가 마감된 시점이었으나 내가 찾아본 시기가 5월 말임에도 공고가 나지 않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아직 기회가 있다. 그날부로 바로 기획안을 구상했다. 큰 틀은 동네서점에서 할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내가 서점을 운영하며 다다라야 하는 최종 목표치에 근접한 일 중 하나였다. 오히려 좋다. 미리 미래 계획을 세워볼 수 있으니.


그즈음 나는 ‘무엇이든’ 중 하나로 <무엇이든 쓰는 밤>이라는 글쓰기 클럽 모집 공고를 냈다. ‘우리가 문장을 끝낼 수 없는 이유, 마감과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를 타이틀로 내세워 함께 글을 쓸 동료를 모집했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이겠다. 매주 수요일 밤 7시 반에 서점에 모여 90분간 글을 쓰는 일.

4명을 모집했는데 감사하게도 구성원이 채워졌다. 예상보다 긍정적인 성과였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워가 많은 것도 아니고, 책방이 번화가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픈한 지 고작 한 달 된 서점의 활동을 누군가 함께 해준다는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덕분에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이든 쓰는 밤>의 연장선 느낌으로 두 가지 기획안을 완성했다. 1안은 쓰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으로 각 분야 창작자를 모아 그들의 비하인드를 듣고 창작 활동에 참여하는 구성이었다.

소설, 시, 희곡, 시나리오. 네 가지 분야의 쓰는 사람에게 궁금한 것을 써 내려가다 보니 러프하게 내용이 만들어졌다. 쓰는 사람이라면, 창작자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만들어내는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나 같은 궁금증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2안은 조금 더 심층적인 쓰는 일이었다. 소설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 소설을 쓰고 합평해 보는 시간. 4주에 걸쳐 진행되면 하나의 소설 작문 수업 같은 느낌이 될 것 같았다.


섭외는 인맥을 동원했다. 소설 수업을 들었던 작가님께 가장 먼저 제안을 했고, 작가님의 소개로 시인 한 분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소설 수업에서 만난 독립영화 감독까지. 너무도 감사한 사람들.

희곡은 고민이 조금 있었는데 지인 중 연극배우가 있어 연극배우라는 창작자에게 강연을 부탁해볼까, 생각했지만, 연극배우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기획 의도에서 조금 비껴가는 느낌이었다. 아직 공고가 안 떴으니 일단 홀딩.


6월이 시작되고 <무엇이든 쓰는 밤>의 첫 번째 밤이 시작되었다. 서점 내 가장 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을 치우고 깨끗하게 소독하고 의자를 각각의 위치에 놓았다.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서점의 조명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자 7평 남짓의 작은 서점이 각자의 작업실로 재탄생했다.

소설, 필사, 에세이 그리고 희곡. 각각 자신의 씀을 챙겨온 사람들은 집중해서 글을 써나갔다. 그리고 희곡. <무엇이든 쓰는 밤>에서 만난 사람 중 한 명이 극작가라니. 마침내 기획안의 마지막 조각이 채워진 느낌이었다.


6월 둘째 주, 드디어 서울형책방 공고가 떴다. 기획안을 다듬고 섭외를 마무리하고 예산안을 작성했다. 지원사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첫 번째, 홍보. 일단 성북구에서 책방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문화활동을 찾아보다 우리 책방도 스쳐 가듯 인지할 수 있겠지. 두 번째, 창작자와 함께 무엇인가를 한다. 창작자는 서점원만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고정적인 수익이 있는 편은 아니다. 서점에서 그들의 창작물을 판매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약간의 책임감이 있다. 세 번째, 작년 공고문에는 활동을 진행하는 서점에 대한 금전적 지원은 전혀 없었는데 올해는 기획료 항목으로 직접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몇 주 동안 서울형책방 사업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6월 14일, 나는 마감일 하루를 앞두고 메일을 보냈다. 끝.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 선정된다면 설렘을 안고 차근차근 준비하면 될 일이고, 떨어진다면 그동안 했던 모든 게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지만(사실 떨어진다는 자체보다 이게 가장 두려운 일인 것 같다) 어쨌든 무언갈 시도했다는 것에 뿌듯하기도 한 그런 일이 되겠지. 마치 취업을 위해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는 순간 같기도 했다. 정성껏 한 자 한 자 이력서를 채우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한 뒤 메일을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 인생은 언제나 선택받는 일의 연속이군 싶다.


다음날인 일요일이 되자 나는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서울형책방이라는 큰 덩어리 하나를 떼어내니 허탈함이 느껴졌다. 텅 비었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그동안 내가 지원사업에 너무 꽂혀있었나 싶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로 시작하는 나른한 가사가,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이런 감정은 뭘까.


그동안 열심히 일해 온 보상으로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읽는 날로 정했다. 나의 계획은 쓸데없이 너무나도 잘 지켜졌는데 끄물끄물한 날씨 덕분인지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어김없이 보릿고개를 걱정하기에 이르는 사고의 흐름. 이제 종강하면 평일엔 학생들이 없다. 또 다른 ‘무엇이든’이 절실해지는 일요일. 일단 오늘은 후퇴. 길가에 고양이조차 지나다니지 않는 일요일 6시 15분. 서점을 방문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조금은 씁쓸한 마음, 서점 오픈 후 처음으로 조기 퇴근을 결정한다.


2025년 6월 15일 일요일 사람들은 엔딩 이후를 궁금해하지 않을지도




서점원의 문장과 책

: 그럼에도 내가 불투명한 미래를 선택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불투명한 만큼 언제 어떤 펀치가 날아와 나를 치고 가더라도 전혀 이상할 일이 없는 미래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멀리 큰 파도가 온다고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삶이라는 것이 이런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리고 나의 선택을 믿으며.


⟪내가 되고 싶은 사람⟫, 김져니 지음, 요호이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2화12 손녀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