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전민 출신이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가느다란 계곡물이 두 줄로 흘렀다.
봄엔 진달래가 온 산을 점령했다. 싸리문만 나가면 진달래꽃이었다. 언니들이 따 먹으니 나도 따 먹고 동생들도 진달래꽃을 하도 먹어 입술이 파랬다. 여름엔 집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 포도나무가 그늘을 만들었다. 덜 익은 포도를 이빨이 시도록 따먹었다. 가을이 오면 도토리를 줍고 날밤을 까먹었다. 겨울엔 눈에 미끄러지면서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왔고, 양지쪽에 앉아 날고구마를 씹었다.
오빠는 아버지랑 겸상했고, 여자들은 한 양푼에 담긴 밥을 방바닥에서 먹었다. 꽁보리밥에 짠지를 먹었다. 어쩌다 자반고등어가 올라오면 아버지와 오빠 몫이었다. 나는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자반고등어가 올려진 상을 한 번씩 쳐다봤다. 여자는 사람도 아니었다. 섭리대로 순서대로 낳은 개, 돼지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돼지보다는 낫다. 돼지는 음식 찌그러지기를 먹었잖아. 그래도 개보다는 낫다. 개는 다 크면 개장수에게 팔려 갔잖아. 억울한 것도 슬픈 것도 아니었다. 섭섭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땐 그러려니 했다. 성인이 되면서 억울했고, 섭섭했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걸 있으면 먹고, 없으면 못 먹었다. 산에 파묻혀 살았다.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여자는 복종하며 살아야 하고, 남자는 군림하고 사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삶은 색과 질이 다 달랐다.
나는 순서대로 계절 따라 피어나고, 나부끼고, 흘러갔다. 언니들은 국민학교만 겨우 나왔다. 밥 해야 한다고, 동생 돌봐야 한다고, 농사일 바쁘다고, 날씨가 안 좋다고 툭하면 결석했던 언니들은 한글만 겨우 깨쳤다. 나는 고집불통이라 학교는 가야 한다고 농사일이 바쁘던지, 비가 와도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결석을 안 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까지 보내줬다. 내가 별다른 재주나 공부에 대한 뜻은 없었지만, 책을 좋아해서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밥 먹을 건 먹고, 밥 안 먹는다고 누구도 신경을 안 쓴다는 걸 알기에 밥은 먹고, 입은 댓 발 나와 가지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오빠는 보내주면서 나는 왜 안 보내주냐고!”
“넌 기집애잖아!”
“책에서 보면 여자도 배워야 한대.”
“그놈의 책이 곡식을 키워, 옷을 쥐, 밥 먹여주냐? 이 육실할 년아!”
엄마는 부지깽이로 등짝을 때리며 육실할 년이라고 욕을 했다. 하도 들어서 욕 같지 않았다.
“난 차별 당하는 게 기분 나빠. 더럽게 나빠.”
도시에서 자취하며 고등학교에 다니는 오빠 자취방으로 옷 보따리를 싸서 화전 밭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무섭던 오빠는 내게 뭐라 안 하고, 순희는 내가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화전민의 때를 벗고 도시 여자가 되었다.
30년 후에 책이 밥을 먹여주고 옷도 사 줬다. 엄마와 부딪칠 일이 생기면 나는 옛날 일을 따졌다.
“책이 밥 먹여주냐며? 주잖아!”
엄마는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셋째 딸은 도서관에 다닌다며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