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도서관 02

by 산너머

기간제는 없어지고, 이젠 정규직만으로 도서관이 돌아간다.

자원봉사는 자료실에서 책을 꽂고, 찾고, 도서관 이용 안내를 한다. 데스크에서 이용자를 대할 필요가 없어서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다. 취미생활을 하듯 운동을 하듯 도서관 문을 여는 기운이 활기차고 당당하다.

도서관 측에서도 경력직인 나를 대환영이었다. 사서 선생이나 사무실 직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맙다고 했다. 직원들의 할 일을 내가 무보수로 도와주니 고마울 수밖에. 나도 직원으로 있을 때 자원봉사자가 있으면 한결 편했고 고마웠다.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자격지심이 많았지만, 자원봉사를 하면서 그런 게 없어졌다. 누굴 만나면 묻지도 않는데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한다며 먼저 자랑을 했다. 자랑해도 되는 나 자신이 멋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뭐 하려고 태어났을까. 한낮 햇살이 눈부셨지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기력했다. 사는 동안 계속 이런 생각에 빠져서 살았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나쁜 기운이 많이 빠졌다. 구름이 끼어도 잿빛 감성이 돌았고, 살구꽃만 피어도 꽃 빛 감성으로 가슴 벅찼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하늘이 나지막해도 종합자료실 안을 빙빙 돌면 기분이 아슴푸레 풀렸다. 참? 종합자료실에서 하루 4시간 봉사를 한다.


멋을 한껏 부린다. 큰아들이 대학교에 다닐 때 매일 멋을 부려서 누굴 닮아 저러냐고 잔소리를 했는데, 이제 봤더니 나를 닮았다.


공기가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 겨울을 싫어하지만 보고 싶은 책을 골라 직원용 둥근 탁자에 앉아 커피와 식빵 한 조각에 행복하다. 크림빵이나 카스텔라보다 식빵을 좋아한다. 식빵을 손으로 조몰락조몰락 뭉쳐 쫄깃하게 만들어 먹었다. 간식을 먹고 있으면 사서 선생들이 어여 드시라고 책은 나중에 꽂으라고 떠받들어 준다. 진짜 내 팔자가 최고다. 얼른 책을 꽂고 싶어 빵을 입속에 욱여넣는다.


한 달 쓸 돈을 정해 놓았다. 앞으로 얼마만큼 살지는 몰라도 계산을 했더니 백만 원 정도면 삼십 년을 살아도 어디다 손 벌릴 일을 없을 것 같다. 출근하는 시간은 여행이고, 자연을 보는 순간은 열정이고 책을 빌려보는 취미는 활력소가 된다. 이 모든 일상이 돈 쓸 일이 전혀 없다. 참? 교통비는 도서관에서 준다.

유일하게 돈을 쓰는 곳은 커피 사 먹을 때. 맘에 드는 카페를 눈여겨 뒀다가 카페에 앉아 창밖을 한 시간 보다가 출근하는 버스를 탄다. 주말에는 동네 산책을 하다가 카페에 들어가서 창밖을 두 시간 본다. 가끔 딸이 와서 커피를 마셔준다. 아들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바라지도 않는다.

커피 마실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남자를 어디서 만나는지 모르겠고, 그런 남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란 한 가지밖에 모른다. 그런 남자는 필요 없다. 혼자가 자유롭다. 참? 가끔 남편이 와서 커피를 마셔준다. 근데 남편은 커피 살 돈이 없다. 그런 남편도 사실 필요 없는데. 그냥 커피 마시는 분위기에 모든 게 용서가 된다.

남편은 지방에 작은 집을 사서 나랑 같이 살고 싶다고 했는데, 집은커녕 커피 살 돈도 없으니 말 다 했다. 그냥 커피나 마시자. 커피 중독이냐고요? 그렇긴 한데…. 아마도 카페 분위기 중독인 것 같다.


변두리 도서관은 바쁘지도 않고 너무 한가하지도 않아서 딱 알맞다. 다른데 옮길 필요도 없다. 늙어서 나오지 말라고 할 때까지, 몸과 정신이 똑바를 때까지 다니고 싶다.

“팔십 살까지 도서관 다닐 수 있게 해 주셔~여!”

요즘 기도 제목이다. 종교가 있냐고요? 없다.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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