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도여행기
전라도 강진에는 볼거리가 많다. 천년 고찰 무위사, 백련사, 다산초당, 영랑생가, 가우도, 남미륵사, 강진다원, 생태공원.... 그만큼 산세가 좋고, 풍경이 아름다워, 옛부터 유명한 선비들이 기거하며 천혜의 자연에서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그 중에도 백미는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가 계곡 옆에 조성한 백운동원림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백운암이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백운동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의 하나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보존된 별서이다.
백운동원림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강진이 자랑하는 10만평(33.3ha) 규모의 녹차밭(태평양다원이 운영)을 지나 좁은 나무숲을 100미터 정도 지나면 나온다. 백운동원림이 더욱 운치가 있는 이유는 주변으로 멀리 월출산과 녹차밭, 다원 그리고 대나무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곳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백운동원림 뒷산에 이담로 처사의 부부묘가 있다. 이담로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기 초야에 묻혀 사는 은둔 선비임에 틀림없다. 처사의 뜻이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사는 선비를 일컫는 조선시대의 통상적인 문화현상이었다 한다.
백운동원림 입구로 향하는 길에는 울창한 대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다. 그 내리막이 대나무숲과 함께 선비들의 기개와 풍류를 느끼게 해줘 마음이 정갈해진다. 당시의 시대상이 왕권 다툼과 당쟁으로 얼룩져, 학문에 매진하고 자연을 벗삼아 여유로운 삶을 즐기려는 선비들에게는 환멸을 느끼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 정약용도 당시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에 오르는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백운동원림에 들려 하룻밤 묵고 갈 정도로 애착이 컸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운동원림 출입문은 소박하다. 현판에는 백운유거(白雲幽居)라 쓰여 있는데,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리저리 떠돌아가니는 선비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선비들이 연못을 사이에 두고 술잔과 차를 하며 시를 읊었을 곳으로 생각된다. 다산 정약용은 이곳의 연못을 여섯굽이의 물결이라 지칭하였는데, 유상곡수에서 따왔다고 한다. 유상곡수란 '술잔을 띄워 보낼 수 있는 아홉굽이의 물길'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길에 술을 띄워 보내며 유유자적했을 모습을 연상하니,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한량이 틀림없다.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연못에 술을 띄우며 술을 먹을 수 없지만, 백운동원림의 정취와 분위기에 취해 차한잔하는 여유는 부릴만 하다. 수소실은 근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본채 아래 초가 세칸으로 지은 취미선방은 사랑채로 쓰였다. 꽃계단을 내려와 세칸으로 되어 있는 초가는 운치와 여유가 느껴진다. 지나가다 하룻밤 묵어가는 사랑방으로 쓰였으니, 당시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다녀갔겠는가?
백운동원림은 주인이 사는 안채, 사랑채인 취미선방, 연못과 수소실, 대문 밖에 있는 정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우릴수 있는 공간이 있고, 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가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자이당은 '스스로 즐거움을 맛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담로의 6대 손인 이시헌의 호가 자이였다.
샛문으로 나오면 백운동원림 옆으로 계곡이 흐른다. 담벼락에 세월을 느끼게 하는 이끼들이 정겨운 것은 어찌된 이유일까? 샛문을 따라 걸으면 계단이 나오고 정자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정자에서는 신선들이 머물렀다는 '옥판봉' 이 보이고, 멀리 월출산도 보인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 옆으로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의 비석도 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본 백운동원림. 화려하지는 않지만,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진 정갈있는 풍채, 아기자기한 한옥과 초가집, 연못 등이 당시 은둔 선비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백운동원림의 아름다움을 12경으로 그렸다는 내용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미리 사전 지식을 가지고 가면 도움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