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실패
가끔 노량진을 간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여전히 취업준비와 시험준비로 붐비는 노량진은 활기가 넘쳐서 좋다. 그 동네에 사는 선배는 걸어서 마실 나오듯 약속장소로 와서 가볍게, 때로는 삼겹살에 소주, 때로는 족발에 막걸리, 그리고 때로는 우동 국물에 몇 개의 스시로 충분한 회식을 즐기다 들어간다. 볼 때마다 그 선배는 노량진으로 이사오라 한다. ‘이만큼 지천에 먹거리와 편의시설이 있고, 교통이 편한 곳이 없다’고. 자주 오다보니 나에게도 친근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단점은 학원가가 밀집되어 있다보니, 다양한 외부사람들로 차고 넘쳐 항상 붐비고 시끄럽다. 먹고 마시고 즐기기엔 충분하나, 생활터전으로 안락함과 평온함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온통 주변이 특정 목적의 시험을 공부하는 분위기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내가 좋게 보았던 그 활기참은 젊은이들이 많아서 그런 것이고, 내면을 들여다 보면, 젊은 청춘들이 답도 없는 취업공부에 에너지와 시간을 축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15~29세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56만 명에 달하고, 그중 일반 사기업 30%, 공무원 준비생 23%로 과거에 비해 공무원 선호도는 다소 떨어졌지만 여전히 높으며, 문제는 청년들이 졸업 후 첫 직장을 갖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평균 11.5개월로 역대 최장기간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평균 근속 기간은 1년 7개월 남짓에 불과하다. 이러니 청년층 경제활동참가율은 겨우 50%에 그치고 있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일터에 없고, 학원과 도서관에서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는 현실이 냉혹하고 참담하다. 이런 현상은 국가뿐만 아니라 가계경제에도 부담스런 먹구름이 되고 있다. 퇴직을 한 가장들이 은퇴 후 남은 여생을 견딜 수 있는 경제적 여력도 부족한 판국에 젊은 아이들의 생계도 같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양가족을 끝도 없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이 땅의 중장년층도 미래가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유력 신문사를 통해 직장인 1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스스로 퇴직하고 싶은 나이’가 평균 60세인 반면, ‘실제 퇴직할 것으로 예상되는 나이’는 평균 53세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은 크고, 그에 따른 위기감과 부담감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20, 30대 직장인들은 ‘정년을 채울만큼 한 회사를 오래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오래 다니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 맞다.
"기업은 우리를 배신한다"
우리의 기업을 보면 안다. 기업은 청년의 성장이나 미래의 이익보다 현재의 이익을 따지기에 급급하다. 기업은 늘 조급하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떨어지면 경쟁에서 뒤처지고, 어느새 망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그래서 기업은 점차 참을성을 잃고, 이에 따라 일종의 자비심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조급함은 기업에 투자하는 금융기관이나 자본가들도 마찬가지다. 더 빨리 더 많은 수익을 채근하는 조급한 자본은 기업 조직의 체질을 변화시켰다. 의사결정이 더디고 경직된 기업은 자본의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고, 유연하고 역동적이며 빠른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내 주변에도 쉽게 볼 수 있다. 매출 200억대를 올리며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지방의 중소 IT업체가 한 순간 비즈니스 투자를 잘못해, 폐업의 수순을 밟고 있으며, 스타트업으로 7년만에 약 200억을 투자받으며 급성장하고 있던 유통업체가 하루아침에 영업중단을 선언하고, 소송에 휘말리고 있으며, 그 유명한 새벽배송의 상징 ‘마켓컬리’와 유통의 혁명을 이끌던 ‘티몬’이 휘청이고 있다.
기업의 현실이 이러니, 과거처럼 인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기업은 직원들에게 기술과 지식을 쌓기 위한 교육 훈련과정을 제공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기업은 신입사원을 현장에 바로 투입시켜 실무를 강요하고, 단 몇 주 만에 업무를 파악해서 빠른 일처리 신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그래서 기업은 이제 수시로 경력사원을 채용하고 적당히 사용하다, 효용이 떨어지면 과감하게 버린다. 이런 현상으로 오히려 바로 대기업 입사가 어려운 경우에는 적당한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경력사원으로 대기업에 입사하는 편이 더 수월해지기도 한다. 실제 내가 일했던 중소기업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했다.
"변한 것은 세대가 아니라 시대"
고도성장의 풍요로운 시기를 경험한 기성세대들에게조차 작금의 시대적 변화는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성장과 여유를 후배 세대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려던 계획은 산산조각나고, 부족한 일자리와 치열한 경쟁구조로 불안과 불투명한 미래를 넘겨준 것에 대한 자책감과 남은 여생을 위해 또 다시 일터를 찾아야하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시대의 미래 모습을 대변하는 어린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공무원인 시대적 아픔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목적의식을 심어줘야 하는 사명감도 가져야 한다. ‘변한 것은 세대가 아니라 시대’라는 말처럼 변화된 시대에 맞게 요즘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은퇴를 앞두고 있는 중장년 층에서도 주어진 여건하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저성장시대에 맞는 생존전략, 행복전략을 찾아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인간 또한 생존을 위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고, 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변해버린 시대에 적응하려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이런 책임감과 사명감이 나의 남은 삶을 설계하게 만들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하여 회사를 창업하겠다는 생각은 3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 사이 뜻이 맞는 직장 동료들끼리 수시로 만나 같이 계획을 세우고 구체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의기투합도 했다. 창업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공동작업도 하고, 사업의 구체화를 위해 수차례의 워크삽과 세미나가 있었다.
8년을 근무하며 나의 삶은 고정되어 있었다. 아침 5시 20분이면 자명종이 울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눈이 떠져 있으며, 간단한 세수와 출근 복장을 챙기고 아침은 먹지 않고 회사 사무실 근처에 있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매일 출근 전 운동은 직장생활 내내 있었다. 삼성으로 옮긴 1997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얼추 25년을 거의 매일 새벽운동을 한 셈이다. 대신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30분에서 1시간 동안 가벼운 스트레칭과 기본적인 근력운동을 한다. 어쩌면 매일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과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운동이 일상이 된 것이다. 이렇게 평소에 쌓은 기초체력 덕분에 지금도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람도 때론 배신한다"
3년을 준비하고 창업한 회사가 예상한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 사이 1년 남짓 준비한 예비창업패키지를 위해 올해 2월 말로 퇴직을 한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예비창업패키지’는 정부가 매년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약 900여개의 업체를 선정 평균 5천만원에서 1억까지 1년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넉넉한 자금을 가지고 창업을 하는 업체가 아니면 무조건 도전해야 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서울시에서 진행한 창업 컨설팅을 통해 탄탄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고, 비교적 경쟁이 수월할 것으로 생각한 지방에 신청을 했기 때문에 무난하게 통과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차는 통과되었지만, 최종 선발은 되지 못했다.
예비창업패키지를 통한 창업을 시도했던 첫 번째 도전부터 벽에 부딪힌 나는 큰 충격과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특히 가장 뼈아픈 것은 창업을 같이 준비했던 예비 동업자들의 이탈이었다. 5명 중 한 명은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캐나다로 떠났고, 핵심인력인 두 명은 여전히 전 직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당장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인이 창업되고 초창기에 겪는 어려움을 같이 나누겠다는 신념과 창업의지를 스스로 져버린 것이다. 그들이 합류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먼저 총대를 메고 시작한 나는 남은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을 영입하여 어렵게 5월에 법인을 설립하였다.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마음이 아프다. 배신은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가장 앞서서 창업을 부르짖으며 사람들을 부추겼던 직원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욕심만 챙길 때 배신감은 더한다. 평생 월급쟁이로 남아야 할 사람이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혼자는 살 수 없고, 가족을 이루든, 조직을 이루든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물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독신주의자들도 있다. 독신주의자들의 삶도 존중한다. 하지만 독신주의자들 조차도 남들과 관계를 갖지 않고 혼자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나에겐 부족한 동업자 대신 내가 그동안 일을 통해 구축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다행히 같이 일을 해 본 사람들은 나의 역량과 경험을 인정하고 신뢰를 주었다. 덕분에 내가 직접 부릴 수 있는 조직은 없지만, 같이 협력해서 할 수 있는 동종업계의 직원들은 있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일을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특히, IT업종 자체가 프리랜서의 비중이 큰 사업이 많은 분야라 사람이 없어 일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 문제는 척박한 비즈니스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전략적 사업역량이 필요하다.
사업기회를 만들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없어 못하는 경우는 아직까지는 없었다. 이 또한 나에겐 귀중한 자산이고 행운이다. 어차피 우리가 살고 있는 비즈니스 환경은 고정되거나 영원하지 않기에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자원과 시스템, 체제를 활용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