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가? 여행을 떠나라
"모든 것이 흘러가는 이 지상에서, 우리 마음을 의지할 만큼 견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의 존재와 하나가 되는 상태, 그 평온한 고독의 순간만큼은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준다." - 장 자크 루소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
루소의 사후에 출간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은 그가 세상으로부터 오해받고 박해받던 말년에, 모든 사회적 관계를 뒤로하고 오직 '자신과 자연'에게만 집중하며 쓴 고백록이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고독의 기쁨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 맞닿아 있는 깊은 평온이다. 루소가 고독 속에서 발견한 가장 큰 기쁨은 어떤 성취나 소유가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는 그 순수한 감각 자체이다. 루소에게 사회는 늘 '위선'과 '의무'를 강요하는 곳이었다. 고독은 그 사슬을 끊고 얻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루소는 고독할 때 비로소 자연의 세밀한 아름다움이 보인다고 말한다. 루소의 이 고독한 몽상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꿈꾸는 은퇴자들에게 "혼자 있어도 결코 초라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장 화려한 내면의 잔치를 벌일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루소에게 고독은 벌이 아니라 보상이었다. 그는 사회라는 사슬을 끊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존재의 기쁨과 마주했다. 은퇴 후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자발적 고독'이다. 이제는 남의 시선이 아닌,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이다.“
창업을 통해 내 삶의 주인이 된 후, 나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여행이다. 금전적으로는 예전보다 덜 풍족할지 모르나, 마음의 여유만큼은 비할 데 없이 넓어졌다. 발길 닿는 대로 전국을 유랑하는 즐거움이 그 빈자리를 가득 채웠다.
우리나라는 대륙에 비하면 작은 땅이라지만, 여전히 발길 닿지 않은 낯선 곳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목적지를 특정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허락하면 가방 하나 둘러메고 정처 없이 떠날 뿐이다. 가급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택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와 마주하고, 생경한 음식을 음미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완전한 이방인이 된다.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방랑자가 되어 고독 속을 거닌다. 이 고독은 내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허락하고, 나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심미안을 선물해 준다. 은퇴 후의 삶이란, 어쩌면 이렇게 익숙한 나를 버리고 끊임없이 낯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세르반테스가 감옥에서 쓴 ‘돈키호테’는 망상가의 대표적인 인물을 묘사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망상에 빠진 노인이지만, 그 내면에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향한 고독한 결단이 숨겨져 있다. 인생의 전반전이 '사회라는 거대한 풍차'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였다면, 은퇴는 그 풍차로부터 잠시 물러나는 시기이다. 사람들은 은퇴한 이들에게 "이제 조용히 여생을 보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르반테스의 노기사 돈키호테는 그 나이에 비로소 낡은 갑옷을 꺼내 입고 들판으로 나섰다. 그는 왜 편안한 안락의자 대신 고독한 길을 선택했을까?
은퇴 후 몰려오는 감정은 두 종류이다. 세상에서 잊혀졌다는 '외로움'과, 비로소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 '고독'이다. 그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조롱당했지만 외로워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정의한 기사도라는 '철학' 속에 머물렀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타인이 부여한 역할(직장인, 가장 등)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오는 공허함을 '외로움'으로 채우지 말고, 그것을 나만의 꿈을 설계하는 '창조적 고독'의 시간으로 치환해야 한다.
남들은 풍차라고 비웃지만, 돈키호테에게 그것은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거인이었다. 은퇴 후 우리가 시작하려는 새로운 일(일, 취미, 공부)도 누군가에겐 "그 나이에 뭘 그런 걸 하느냐"는 비웃음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나만의 철학이 있는 고독한 기사는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나에게만큼은 거대한 도전이자 삶의 목적이 된다. 쇤부르크가 말한 '우아한 가난'과 겔렌의 '과잉 충동'을 다스리는 힘도 결국 이 고독한 자기 신뢰에서 나온다.
돈키호테의 곁에는 늘 산초가 있었다. 진정한 고독은 타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진 사람만이 타인과 '비굴하지 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내면이 단단한 고독으로 채워진 은퇴자는 산초와 같은 소중한 인연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결코 그에게 의존하여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은퇴는 삶의 무대가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무대 장치를 설계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돈키호테가 이름 없는 노인에서 위대한 기사로 리빌딩된 곳은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황량하고 고독한 라만차의 들판이었다.이제 우리 안의 고독을 갑옷 삼아, 잊고 있었던 나만의 꿈을 향해 로시난테의 고삐를 당길 시간이다.
”나는 단골 바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고독을 즐기는 데 서툴다. 하지만 지방 강연회나 여행을 가서 가끔 혼자 가게에 들어갈 때, 낯선 도시가 주는 분위기 때문에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신기한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방언도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한다“ - 다네다 산토카 / 일본의 방랑시인 -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간헐적으로 생기는 지방의 강연을 위해 낯선 곳을 방문하고, 처음 찾은 지방의 음식점에서 느끼는 생경함. 진정한 고독은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타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강연을 마친 뒤, 혹은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낯선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은 곧 해방감으로 바뀐다. 이곳에서 나는 누구의 아버지도, 어느 직장의 상사도 아닌, 그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명의 이방인일 뿐이다. 나를 규정하던 모든 수식어가 증발한 자리에 '오롯한 나'만이 남는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은 소음이 아니라 감미로운 배경음악이 된다. 그 낯선 언어들은 나에게 아무런 이해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소리들 틈에서 나는 비로소 완벽한 '관찰자'가 된다. 타인의 삶에 개입할 필요도, 내 삶을 설명할 이유도 없는 상태. 이것이 바로 루소가 꿈꿨던 '장애물 없는 자유'의 현대적 실현이 아닐까.
은퇴 후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는 평생 익숙한 관계와 역할 속에 우리를 묶어두었다. 이제는 자발적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선 골목을 헤매는 일, 나를 모르는 이들 틈에서 침묵을 즐기는 일. 그 이방인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은퇴 철학은 비로소 단단해질 것이다.
오늘 이른 새벽부터 찬 공기를 마시며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충주에 있는 건국대 글로컬 캠퍼스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충주 공용 터미널에서 택시를 이용해 캠퍼스로 가는 길은 고즈넉한 시골길이었다. 시내에서도 한참 벗어난 외딴 곳에 있는 캠퍼스는 방학을 맞이해 학생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의 지하철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이 곳에서는 시간도 천천히 흐를 것만 같았다. 마음은 푸근해지고, 정신은 맑아졌다.
이제는 생각해 본다. 나에게 주어지는 소중한 삶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현명한 것인가? 소중한 사람들과 만나 생각을 교류하고, 비즈니스를 함께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나와 소통하며, 나를 이해하려는 삶. 그또한 내 삶의 소중한 부분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