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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옥 Mar 19. 2024

내가 선택한 리스크가 나를 만든다

리스크는 상대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리스크는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증가할 수도 있고 축소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팬데믹 상황에서 지하철을 타는 경우 본인의 마스크 착용여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지하철공사의 예방조치, 타인의 마스크 착용여부, 정부의 권고사항 등 개인과 기업, 정부 모두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데 특정한 역할을 한다.




역사상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한 도전을 한 사례는 많다. 1982년 독일의 '베르너 헤어조크' ‘위대한 피츠칼라도’라는 영화를 제작한 감독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무모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영화 ‘위대한 피츠칼라도’는 ‘배가 산으로 가는’ 이야기다. 농담삼아 이야기하는 수준이 아니다. 실제로 배가 산으로 가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영화로 그는 3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는다. 


1900년대 초반 페루에서 실존했던, 아마존에서 고무나무 사업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을 모티브로 삼았을 뿐,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설정이 흥미롭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을 모델로 없었던 일, 혹은 불가능한 일을 실제로 실현한 영화, 영화를 찍으면서 거대한 배를 리얼하게 산으로 옮긴 것이다.

아마존 정글 한가운데에 거대한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 위대한 가수 카루소를 초청하여 공연하려는 계획을 꿈꾸는 사나이 ‘피츠카랄도’, 모두가 그의 꿈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페라 하우스를 짓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전 재산을 투입하여 아마존 밀림에 있는 고무나무를 채취하기 위해 배를 띄우지만, 태풍과 급류를 만나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원주민들의 피습으로 죽을 위기도 맞는다.

하지만 이런 극한적인 상황에 처했지만, 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광기를 표출한다. 마치 감독의 광기를 배우에게 그대로 투영하는 듯한 모습이다. 


급기야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배를 이끌고 산을 넘어 고무나무 지대로 접근하려 한다. 이에 동원된 인디오 원주민들은 자꾸 죽어나가지만 피츠카랄도를 예언가로 숭배하는 그들은 끝까지 따른다. 거대한 증기선을 끌어올려 높은 산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더위와 질병에 시달리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증기선을 산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파산하고 만다. 


영화 말미에는 남은 재산을 끌어 모아 증기선 안에서 오페라 가수들을 초청하여 ‘선상 연주’하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영화제작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고, 거대하고 불가능한 꿈을 위해 육체적 고난과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고 실제로 구현해 내는 감독의 집념과 의지에 놀라울 따름이다.  




리스크는 가정, 직장, 사회에서 매일 하는 일상적인 선택에서부터 다양한 행동의 의미를 부여한다. 아침 식사를 할까 아니면 거를까? 헬스클럽에 들러 운동을 할까, 아니면 침대에서 맛있는 치킨이나 먹을까? 무단횡단을 할까, 아니면 안전하게 신호가 있는 건널목을 지날까? 지금 직장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나설 것인가? 


이처럼 삶 자체가 수많은 리스크에 직면하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파장이나 결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눈앞에 닥친 위험과 기회를 직면하거나 외면하는 이유를 보면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 고유의 리스크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생태계, 즉 문화, 사회, 정책, 경제 환경 등은 한 개인의 성격을 약화시킬 수도 있고, 강화시킬 수도 있다. 영국의 심리학자 '제프 트리키'는 리스크가 전적으로 생존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리스크와 기회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것과도 같다.

리스크에 대한 믿음과 그로 이한 각종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리 앞에 놓인 위협과 기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저울질하며 어떤 것을 수용하고 거부할지가 개인, 사회,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리스크는 우리의 성격, 직업, 여가 생활, 사회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리스크 관계를 더 잘 이해하고 발전시킬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금전적인 성공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육체적 건강, 또는 정신적 안정, 영혼의 맑음 등을 모두 아우르는 의미이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리스크를 삶에 적용해보기로 결심했다. 수많은 위험 중에 가장 큰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월급쟁이’로 비굴하게 살 것인가? 어렵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평생 먹고 살거리를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경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독립하여 창업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도전이라 하고, 소수의 지지자들만 용기를 복돋아줄 뿐이었다. 하지만, 창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지만, 우리나라도 많이 개선되고 있고, 실제로 아이템만 좋으면 지원책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 나를 위험의 바다에 떠 밀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한 번 주어진 인생이다. 그리고 그동안 직장에서 죽도록 일할 수 있는 열정과 온갖 굴욕적인 환경에서도 묵묵히 견딜 수 있는 인내와 끈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은 많고, 여전히 건강하다는 것이다. 




리스크를 의미하는 중국어 ‘웨이지(危機)’는 위험을 의미하는 문자와 기회를 의미하는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리스크(위기)는 희망과 두려움, 기회와 위험, 전율과 공포 사이에서 계속 변화한다. 우리가 리스크를 보는 방식은 직업, 문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등이 어우러진 다양한 경험과 각자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사람은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에서도 성공하며, 또 어떤 사람은 좁은 안전지대 밖으로 밀려나면 어쩔줄 몰라 쩔쩔맨다. 내가 40대 초반에 삼성에서 두산으로 옮길 때도 그랬다. 당시만 해도 삼성이란 울타리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울타리가 주는 안욱함이 새로운 둥지에서 또 다시 치열하게 싸우며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때도 탁월한 선택으로 기억된다. 비록 옮겨간 두산도 천년만년 누릴 수 있는 터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에겐 새로운 세상에 나가는 것이 두려운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타고난 성향과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로 리스크와 불확실성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리스크에 부여하는 확률도 따지고 보면 기껏해야 추정치일 뿐이다. 어쩌면 리스크는 케인즈처럼 경제학자가 만들어낸 개념일지 모른다.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리스크는 불확실성을 훨씬 더 많이 내포한 추측에 불과하다.


리스크는 제한적으로만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과가 좋기를 희망하며, 결과가 나쁠까 봐 두려워한다. 리스크는 기회이자 위험이며, 야누스의 얼굴처럼 개인과 집단의 기분에 따라, 관점과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리스크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며 자산 혹은 부채를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스크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리스크에는 불확실성에 둘러싸인 확실성의 요소들이 있다. 우리가 결국엔 죽는다는 것은 리스크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것처럼 말이다. 


리스크는 상대적이다. 북한국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북한을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행동은 큰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지만, 북한에 남아 끔찍한 삶을 살고 생명을 잃지도 모르는 상황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리스크가 작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고국을 탈출하기로 한 결정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리스크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다. 당신은 리스크를 좋게 인식하는가? 나쁘게 인식하는가? 아니면 때에 따라 달라지는가? 당신은 불확실성을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확률이 얼마나 되어야 당신은 ‘예’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과 리스크를 논의할 때 서로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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