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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옥 Mar 25. 2024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인가?

불완전한 내 삶을 위하여


의미있는 삶은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행운(幸運)은 가만히 있는데 찾아오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부지런히 일하고 움직여야 행운이 생긴다. 행운은 뭔가 준비하는 사람,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 지금 편안해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 지금이 힘들어도 그 안에서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온다. 행운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많은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면

많은 장례식에 가서 울게 된다

많은 시작의 순간에 있었다면

그것들이 끝나는 순간에도 있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친구가 많다면 그만큼의

헤어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상실이 크다고 생각된다면

삶에서 그만큼 많은 것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많은 실수를 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 것보다 좋은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 인생 수업 중에서 -



우리는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녀의 책 '인생수업'에서 500명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을 인터뷰한 결과로 '너무 늦기 전에 본래자신의 모습을 찾아, 온전히 자신을 돋보이며, 이 세상에 주인공으로 살아라'라고 말한다.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때로는 부조리하고, 하찮고, 무의미한 것 투성이인 삶에서 추구할 것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즐겁지 않은데도 웃고, 하찮은 것에도 화를 내고, 사소한 것에도 눈물 지으며, 황홀하지 않는데도 새벽을 맞이한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분인 박완서 작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냈다. 스물다섯 살 마취전문의 과정에 있던 외아들을 잃은 것이다, 그녀 인생의 최대 비극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혹한 슬픔'참척(慘慽)'이라 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이다. 얼마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을까?

 

그녀의 고백이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신은 있어야 돼.” 하지만 그 원망의 울부짖음은 하느님이 계심을 믿기에 할 수 있는 행위였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뜻한다. 먼 훗날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만일 그 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 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봅니다. 살긴 살았겠지요. 사람 목숨이란 것만은 환히 보이는 듯 합니다."


고통에 대해 어느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슬프게도 고통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지, 해결하느냐 해결하지 않는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고통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통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고통 안에서 쉴 수 있다. 고통을 받아들일 때 고통스런 상황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평화의 자리가 마련된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죽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가장 비참하게 슬퍼하던 박완서 작가도 2011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별을 고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엔 행복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숙제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한 적이 언제였는가? 마지막으로 멀리 떠나 본 적이 언제였는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껴안아 본 적이 언제 였는가?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그리고 배우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난 내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즐겁다."라고 누군가는 말했듯이, 삶의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입니다.

만약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더 이상 직장이나 가족에 대한 좋은 소식, 월급 인상이나 휴가를 기다리면서 내일을 살지 않는다. '오늘'의 모든 풍요로움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슴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당신 안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불변의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없어지거나 나이, 질병,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당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함께할 진정한 모습이 존재한다. 놀랍게도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인 것이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미 조각상이 대리석 안에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깍아내어 원래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완벽한 조각상이 누군가가 자신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있는 위대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위대함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위대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가장 뛰어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제거했을 뿐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현실에서 쓰고 있어야 하는 가면과 역할들에 가려져 있기가 쉽다. 부모, 회사원, 공동체의 리더, 모범생, 착한 아이 등 역할은 우리의 자아를 파묻는 바윗돌이 될 수 있다. 때로 우리에게 그런 역할이 강요되기도 한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할머니가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손자에게 이야기 한다.


"얘야, 난 만족한단다. 내 삶은 멋지고 완벽했어. 더 이상 내 모습이 생기로 가득 차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난 이미 이 여행에서 많은 것을 누렸어. 삶이란 마치 파이와 같지, 부모님께 한 조각,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조각, 아이들에게 한 조작, 일에 한 조각, 그렇게 한 조각씩 데어 주다 보면 삶이 끝날 때쯤엔 자신을 위한 파이를 한 조각도 남겨 두지 못한 사람도 있단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어떤 파이였는지 조차 모르지, 난 내가 어떤 파이였는지 알고 있단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알아내야 할 몫이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이 생을 떠날 수 있단다."


본질은 내 안에 숨어있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내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나의 진짜 모습, 세상을 살아가며, 퇴색되고, 뭉겨져 있던 나의 진실된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배움이 깊은 사람들은 깊은 내면에 숨어있는 자신을 찾고, 위로 하며 성장시킬 수 있다. 내일을 두려워하거나, 기다리기 전에 오늘 하루를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바보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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