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라고나브섬 프로젝트 연구 1
연구를 시작하려면 윤리 위원회에서 심의를 받아 승인이 나야 착수할 수 있고, 결과물을 제출할 수 있다. IRB는 임상연구윤리위원회의 약자이지만 실상,
'연구하고 싶어? 논문 쓰고 싶어? 윤리적으로 문제없는지 확인받아 와!'
의미로 'IRB' 승인됐냐, 안 됐냐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아이티 식수위생 보건사업 관련해서 연구를 하기 위해 작년부터 임상연구심의를 신청했다. 신청 전부터 이것을 어디에 심의를 맡기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지 난관이 많았다.
왜?
일반적인 경로로 IRB 승인을 받지 못했으니까.
왜?
아이티 국가에는 국가적으로 학문적으로 보건의료계열의 IRB 기구가 없었다.
오엠쥐...
이전에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로 담당 지역인 방글라데시만 해도 병원/학교 기관이라 자체적으로 IRB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어 해당 기관에서의 연구는 기관 IRB를 받으면 됐다.
보통의 경우, 한국이나 미국 연구진들이 프로젝트를 착수한 나라의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연구자의 IRB와 연구대상자의 IRB를 받는 경로가 많다. 연구진은 소속 학교나 연구원이 있으므로 기관 IRB나 없을 시, 국가 IRB 공용 기관에서 IRB를 받는다. 국가 IRB 공용 기관은 한국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는 기본적으로 있다고 보면 된다. 이름이 동일하진 않지만 방글라데시의 경우 역학 조사국이라는 보건복지부 같은 정부기관에서 이러한 보건 연구 IRB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연구진의 나라는 한국이므로 학교 IRB나 국가생명윤리정책원(KoNIBP)에서 심의료를 내고 IRB를 받으면 됐다. 문제는 연구대상자의 나라였다.
아이티는 최근 뉴스만 봐도 알다시피 대통령이 암살되고 각종 기후변화 위기를 직격탄으로 맞고 있어 기존에 있던 나라의 근간도 흔들릴 지경인데 IRB 관련 기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어볼 곳도 없고, 해결해 줄 곳도 없었다.
미국의 경우, 남미 대상으로 연구를 하는 학교나 단체가 많기 때문에 그들끼리 내부적으로 심의를 열고, 현지 조사를 하는 등의 방책을 만드는 것 같지만 나를 비롯한 공동연구진들은 미국인이 아니었고 미국에 적을 둔 연구기관에 종사하지 않아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결국, 연구 총책임자 선생님이 한국 국가생명윤리정책원(KoNIBP)에 직접 문의를 했고, 담당자들이 해당 법령과 윤리 연구 사례를 들춰본다고 고생 꽤나 하셨다.
담당자들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답변이 없었고, 우리는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심의 신청을 위한 서류를 만들었다.
기본 자료는 연구계획서와 설문지, 동의서 등을 첨부하고 해당 사이트에 접속하여 접수 정보를 기재하면서 신청이 된다.
회원가입 창처럼 비밀번호의 조건이 맞지 않거나 주소란의 정보 입력값이 잘못되면 다음 창으로 넘어가지 않듯이 접수창은 연구자의 이력과 생명윤리교육을 수료증이 있는지 등을 점검하며 심의를 신청하게 되어 있다.
연구자들은 연구 윤리와 관련된 교육을 이수하고 수료증을 미리미리 업데이트해 두어야 심의 신청 시 시간을 덜 잡아먹는다.
1차 심의 신청 서류를 완성하고 나니 KoNIBP에서 연락이 왔다.
"전례가 없는 심의라서 회의를 거쳐 심의 신청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고, 결과는 심의 신청 접수해 주시면 되고, 아이티에서 심의받을 수 없는 부분을 부록으로 달아서 참조 문헌 달아두시면 심의 시 위원들이 고려하여 결정하실 것입니다."
됐다!
신청만 하게 된 것도 힘들게 한 고개를 넘는 정도다.
신청은 쉬웠으나 역시나 한 번에 승인은 절대 날 리 없었고, 수정 후 제출, 수정 후 심의, 수정 후 신속심의, 수정 후 승인 등을 몇 달에 거쳐 겨우 넘고 나니 2주 전, 감격의 '승인' 두 글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IRB를 위해 헌신하신 연구책임자 선생님과 현지 스태프들의 노고가 없었더라면 연구 윤리를 지키기 열악한 환경*에서 한국 공용 IRB 승인은 절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연구 윤리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심의 위원들은 최상의 연구 윤리 수준을 지키기 위해 까다롭게 심사한다. 우리의 경우, 문맹률이 높은 대상자들의 상황과 종이, 인쇄기 등이 전기와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환경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원칙적으로 연구 자료 수집을 위해 인쇄된 설문지와 연필을 개별적으로 이용하여 분리된 공간에서 수집이 되어야 했으나 현장 스태프들의 수는 제한적이고 시간 또한 한정적이었다. 전기가 없어 해가 있는 시간에만 진행해야 했고,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배나 당나귀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교통비가 들었으므로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조사 자료를 수집해야만 했다.
학생들 간의 문맹률이 조사 결과 전체의 20-30%였으므로 분리된 공간에서 혼자 문항 작성을 못하는 대상자들은 따로 인터뷰를 수행해야 했으나 10명 중 20-30%면 3명이 된다. 1명, 1명 따로 인터뷰를 해야 하나 위의 상황들로 인해 이렇게 할 수가 없었고 차선책으로 칸막이 설치하여 종이에 숫자 표기 방식을 선택했다.
연구 논문 내기의 1번 스탭이 이뤄지니 그다음부터는 착착 진행됐다.
연구 수집 - 데이터 정렬 - 분석 - 테이블 작성 - 각 부분 나눠서 논문 작성 - 저널지 투고
순서대로 진행이 되어가고 이번 달 안에 저널지에 투고하여 대장정의 1막이 머지않았다.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