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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세 May 13. 2024

거져 준 옷이 나를 살릴 줄이야

싼 게 비지떡? 옛말 믿을 거 못 된다

2021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캠페인을 꼽는다면 무신사의 ‘무신사랑해’ 아닐까. 온라인 콘텐츠를 거의 소비하지 않는 나조차 한 번쯤 들어본 문구다. 물론 그 메시지를 보고 무신사에 접속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무신사의 옷 가격이 선을 넘었다고 불평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얼마나 비싼지 궁금해져 가입하게 되었다. 사이트에 가보니 괜찮은 옷 한 벌을 사려면 50,000-60,000원의 값을 지불해야 했다. 내가 받는 용돈이면 어림도 없는 가격이었다. 나는 앱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아파도 일했다.


나는 어느 마케팅대행사의 사무보조 알바로 일하고 있었다. 엄청난 창의력을 요구하는 일 같지만, 실제론 엑셀을 다루는 게 대부분이었다. 나는 일을 정말 못했다. 여러 페이지를 띄워놓고 숫자에 따라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게 너무 어려웠다. 상사가 30분에 한 번씩 사내 메신저로 한 일을 확인하는 것은 끔찍했다. 여러모로 나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시급은 최저를 웃돌았지만, 많은 액수는 아니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옷은 엄마가 사준 거라 대학생인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옷을 입고 학교 앞 사거리를 걸을 때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창피했다. 학교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꺼려졌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일을 못 해서 남자 동기에게 대놓고 욕먹어도 일을 해야 했다.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안이 심해 자율신경계 통증이 왔고 병원에 가야 했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든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 받든 돈이 필요했다. 나는 사람이 무서워서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번 돈의 대부분은 약값으로 나갔고 남은 돈으로 옷을 샀다.



아픈 여자는 아픈 옷을 입는다.

 

그리고 그 옷들은 지금의 내가 보기에 찢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하나같이 쓰레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존감이 낮아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J사 등 스포츠 의류 브랜드에서 바스트가 강조되는 옷을 잔뜩 사 두었다. 길가의 거울에 비친 나는 키가 작았고 몸이 말랐고 가슴은 컸다. 나는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내가 가진 몸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일부러 달라붙는 옷만 입고 다녔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게, 미디어에 나오는 매력적인 여자처럼 느껴지게. 결국 교회에서도 같은 패션을 고수해 나의 멍청함을 증명해 보이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무신사가 내어 준 자유의 길

 

사무보조 알바는 오래 하지 못했다. 3개월 만에 작년에 수술한 발을 핑계로 관두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났고 올해 여름이 되었다(시기는 아직 봄이지만 날씨는 여름이니까). 부모님께서 작년에 산 여름옷들을 보내주셨다. 입을 수 있는 옷은 한 벌뿐이었다. 무신사가 여름 기획 행사를 열 때 샀던 옷이다. 매년 여름마다 ‘무신사 스탠다드(일명 무탠다드)’는 옷 한 벌 이상을 구매하면 다른 한 벌은 990원에 보내준다. 작년의 나는 라인이 강조되는 슬림핏 긴소매를 사면서 별생각 없이 반소매 티셔츠 하나를 골랐다. 아마 이때의 나는 몰랐을 것이다. 옷장에 처박아 둔 그 990원짜리가 내가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라는 것을.

 

무탠다드의 반소매만큼 내게 어울리는 옷은 없었다. 사무보조 알바 이후 나는 일을 하지 않았고(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서 주머니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또, 작은 키에 마른 체구여서 내 체형에 맞는 옷을 찾기 어려웠다. 2019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반일 감정이 남아 있어서 U사의 브랜드는 내키지 않았다. 그러면 답은 무탠다드였다. 크롭 길이의 반소매 옷은 한 벌에 만 원 초반대였다. 작은 키를 보완할 수 있었고 몸의 선이 지나치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사막에서 바늘이라도 찾은 양 옷을 쟁여두었다. 월요일은 노란색, 화요일은 회색, 수요일은 머쉬룸색. 내가 좋아하는 요일에는 무탠다드의 파란색 원피스를 입었다. K사의 옷처럼 딱 달라붙지 않아 활동하기 좋았다.

 




나는 푸른 원피스를 입고 정신과 선생님에게 “저 이제 거울을 보는 게 두렵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선명한 햇빛을 보았다. 그렇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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