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 에세이
여행지에서 호텔 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이 머무는 곳은 늘 침대다. 하얗고 정갈하게 정돈된 이불을 보는 순간, 마음까지 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몸을 눕히면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부에 닿는 시원하고 뽀송뽀송한 촉감이 온몸을 감싸며, 여행의 피로가 스르르 씻겨 내려간다.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청량한 감촉은 어린 시절, 엄마가 정성껏 풀을 먹여 손질해 덮어주시던 이불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이불 위에서 느꼈던 가슬가슬하고 시원한 감각은 지금도 내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낯선 호텔 방에서도 마음에 드는 이불 하나만 있으면, 그 여행은 이미 절반 이상 성공한 셈이다. 시원하고 빳빳한 그 감촉 하나만으로도 나는 금세 집에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여행지의 피로도, 낯섦도 그 순간 스르르 풀린다.
어릴 적 여름이 시작되면 앞집, 뒷집, 옆집 할 것 없이 이불을 내놓고 풀을 먹이는 풍경이 동네의 연례행사처럼 펼쳐지곤 했다. 엄마는 밀가루로 풀을 쑤셨다. 멍울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저어가며 정성스럽게 끓이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오면 불을 끄고, 고운 체에 한 번 더 걸러낸 뒤, 큼직한 붉은 고무 대야에 풀 물을 붓고 물을 부어가며 농도를 맞추시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불 홑청과 베개 겉싸개를 고무 대야 안에 넣고 엄마는 그것들을 발로 자근자근 밟으셨다. 재미있어 보여, 엄마 팔을 잡고 나도 밟기도 했다. 발가락 사이로 올라오던 찐득한 풀 물은 미끄럽고 간지러워 깔깔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오곤 했다. 내 웃는 모습에 엄마도 함께 웃었다.
적당히 풀이 들여진 이불 홑청과 베개 겉싸개는 햇빛과 바람이 잘 드는 마당 한쪽에 널렸다. 고루 마르도록 이불을 뒤집어가며 널어야 했기에,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하며 천의 상태를 살피셨다. 나는 널린 하얀 이불 홑청이 궁금하여 손끝으로 만져보곤 했는데, 촉촉하던 천이 점점 꾸듯 하게 말라가는 그 변화가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불이 약 80% 정도 마르면, 엄마는 그것을 걷어 몇 번 접어 작게 개고, 얇은 면 천에 넣어 다다미 방망이로 두들기거나, 발로 꾹꾹 밟아 다듬으셨다. 그렇게 구겨져 있던 풀 먹인 천은 점점 평평해지고, 부드러우면서도 특유의 시원한 촉감을 지닌 이불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에도 완전히 마를 때까지 다시 빨랫줄에 널어 햇볕에 바싹 말렸다. 엄마의 그 수고로움과 정성이 있었기에, 무더운 여름날에도 조금은 더 시원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한여름이면 덥다고 투덜거리던 나에게, 엄마는 늘 “시원한 이불에 한 번 누워봐. 더위가 쏴~악 사라지지.” 하셨다. 그렇게 풀을 먹인 이불에 몸을 뉘면, 가슬가슬하고 시원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며 금세 기분이 좋아졌고, 어느새 깊은 잠이 들곤 했다. 오 남매 중에서도 그런 촉감을 유독 좋아했던 건 나뿐이었다.
엄마는 이불뿐 아니라 우리의 교복 셔츠에도 정성스럽게 풀을 먹이셨다. 단정해 보일 뿐 아니라, 먼지도 덜 탄다고 말씀하셨다. 덕분에 내 셔츠는 늘 빳빳하고 반듯했으며, 선생님들은 셔츠 깃을 보며 “너는 언제나 깨끗하고 단정하구나”라고 칭찬해 주셨다. 그 말을 들을 때면 괜히 어깨가 으쓱했고, 무엇보다도 그런 셔츠를 준비해 주신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시어머니도 풀 먹인 이불을 좋아하셨다. 두 분의 방식은 조금 달랐지만, 천이 사그락거리고 청량감을 느끼게 하는 결과는 비슷했다. 시어머니는 통돌이 세탁기의 마지막 헹구는 단계에서 풀 물을 적당히 넣어 돌리셨다. 그러면 힘들이지 않고 이불 전체에 골고루 풀이 배었다. 그 후의 과정은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엄마와 시어머니처럼 여름이 되면 이불에 풀을 먹인다. 예전 시어머니가 통돌이 세탁기로 간편하게 하시던 방식은 드럼 세탁기를 사용하는 지금의 나에겐 적용하기 쉽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큰 고무 대야에 풀 먹일 것을 담가서 발로 밟으셨던 것처럼, 욕조에 적당한 풀 물을 만들어 이불을 넣고 발로 꾹꾹 밟는다.
풀이 골고루 배인 이불을 세탁기로 옮겨 가볍게 탈수한 뒤, 살짝 말려, 면 보자기에 싸고 다시 한번 밟아 다듬는다. 그런 다음 햇살 가득한 베란다에 널어 바싹 말리면 비로소 여름 이불이 완성된다. 조금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지만, 그 시원하고 까슬한 촉감만큼은 지금도 포기할 수 없다. 올해 역대 최고급 더위가 될 것이라는 뉴스와, 연일 30도를 넘나드는 더위가 시작되니, 여름을 맞이할 준비로 다시 마음이 바빠진다.
이불 촉감에 대한 취향은 사람마다 참 다르다. 남편과 큰딸은 폭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을 좋아하지만, 나와 작은딸은 사그락거리고 청량감을 주는 이불을 더 좋아한다. 큰딸은 외할머니 집에 가서 풀 먹인 이불을 깔고 덮고 할 때마다 “까슬거리고 몸이 긁히는 것 같아”라며 투덜거렸다. 반면 나는, 사각거리는 그 소리와 몸에 달라붙지 않는 시원한 촉감이 좋아 잠이 더 잘 왔다.
어린 시절, 몸이 약해 자주 앓았던 나에게 사그락거리는 이불 소리와 시원한 촉감은 불안하고 두려웠던 마음을 오히려 부드럽게 가라앉혀 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어느 순간 몸이 먼저 기억한 감각과 감정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위로를 받고, 평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도, 이불 홑청에 풀을 먹이고 두드려 펴지는 과정과 닮았다. 풀 먹여 뻣뻣했던 천도 여러 번 두들겨지고 다듬어져야 비로소 쓰임의 가치가 올라가듯, 우리의 삶도 때로는 구겨지고, 펴지는 과정을 수없이 겪으면서 더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