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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Jan 11. 2019

영화는 힘들어

영화를 안 보는 이유


나는 영화를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 영화감상이 매우 피곤하기 때문이다. 한 편이라도 보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고, 시공간과 기분 등을 철저히 세팅해야 한다. 최대한 집중하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뒤에는 진이 다 빠져버린다. 감정이 많이 소모된다. 가만히 앉아서 보는데 체력도 소모되는 것 같다. 내 눈에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인간은 하루에 영화를 두 편 이상씩 보는 부류들이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인간과 결혼했다. 게다가 영화 취향도 개와 고양이만큼 다르다. 아니, 개와 상어쯤?


남편이 "오늘 영화 한 편 볼까?"라고 다섯 번 물어보면 나는 한 번 정도 수락한다. 넷플릭스에 월 만 원을 내고 무제한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한들, 나 혼자 이용한다면 아마 본전도 못 뽑을 것이다. 주말마다 TV에서 방영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전부 섭렵하고 유튜브에서 영화 리뷰를 챙겨보기는 한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고는 안 본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다른 일로 피곤한 게 아니라, 그냥 영화 보는 일 자체가 피곤하다. 참 아이러니하다. 늘 이야깃거리를 찾아 레이더를 쉴 새 없이 돌려야 하는 '소설가'라는 사람이 영화 보기를 힘들어한다는 게.

영화를 보고 나면 매우 피곤하다.

아무리 이런 나도 몇 달에 한 번씩 극장에 직접 가서 보고 싶은 영화는 있다. 얼마 전에 신드롬을 일으킨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영화가 그렇다 (시나리오가 탄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남편과 나 두 사람 모두 취미로 밴드 활동을 하고 있고 음악도 많이 듣는 편이라 이런 부류의 영화는 반갑다.



좀비와 히어로가 좋다는 남자


남편은 히어로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신혼 때 <어벤저스 2>를 보고 싶다기에 함께 극장에 갔다 (가줬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온갖 초능력과 스펙터클이 난무하는데 나는 하품했다. 스타크가 아이언맨이 되어 날아다니고 배너 박사가 헐크로 변신해 다 때려 부수는데 나는 졸았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렇게 재밌다기에 케이블 TV에서 방영할 때 한 번 봤다. 주인공이 인간에서 히어로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까지는 볼 만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주인공이 히어로가 된 후 악당을 처치할 때부터 잠이 온다. 좀비영화는 끔찍해서 못 보겠다. 한때는 좀비영화 마니아들을 싸이코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싸이코와 결혼해보니 그다지 싸이코는 아닌 것 같다.

(남편은 <새벽의 저주>와 <나는 전설이다>, <아이 엠 히어로>, <28일(주) 후>를 추천한다고 했다. <창궐>을 보고는 쌍욕을 했다. 공짜표가 생겨 나도 같이 봤다. 이게 영화냐며 나도 욕했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주인공이 한 예술가의 삶을 감시하면서 그에 동화되는 과정이 인상 깊다.

나의 영화 취향이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음...... 뭐라고 해야 할까. <타인의 삶>, <설국열차>, <그랜 토리노> 같은 영화가 좋다. 피도 많이 안 튀기고, 디스토피아 느낌 좀 나면서, 인간미 있는 영화. 다만 영화 보는 일이 피곤하기 때문에 많이 보지도 못하고 많이 알지도 못한다. 내 취향의 영화를 함께 보면 남편은 지루해한다. 내가 영화 보자는 말을 자주 안 해서 다행이라 생각할 것이다.



기억에 남는 영화


몇 년래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 역사물을 즐겨보진 않는다. 다만 시인 윤동주의 삶이 궁금했을 뿐. <동주>를 보고 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신파를 노린 영화는 아니었다. 신파를 노렸다고 하기에는 감독이 주인공의 비참한 상황을 너무 담백하고 초연하게 연출했다. 때문에 단순히 영화의 분위기가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먹먹함과 미안함으로 눈물이 난다. 실제로 나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꾹꾹 눌러 울었다. 슬프고 가여운 마음과는 분명 다른 감정이다.

영화 <동주> 스틸컷. 중간중간에 배우가 읊조리는 시들이 마치 배경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오랜만에 남편과 극장에 가서 <말모이>를 보기로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로서, 소설가로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어휘력이 달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때가 없다. 나만의 어휘사전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감시를 피해 팔도 사투리 사전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피 말리는 작업이겠는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우리땅에서도 밀려나는 우리말을 나만이라도 부여잡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그런 의무감으로 이 영화는 꼭 보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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