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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Jul 04. 2019

복수를 위해 소설을 쓴다

소설 쓰기의 좋은 점

창작은 고통이지만 창작은 카타르시스다


요즘 좀 열 받는 일이 있다. 남의 책에 실린 내용을 자기 책에 덕지덕지 잘라 붙인 다음에 단어랑 토씨 몇 개, 문장 순서만 조금 바꿔서 '이게 내 창작물이오'라면서 따봉 마케팅에 질리도록 만들어버린 베스트셀러 때문이다. 창작하는 작가로서 나는 분노하고 있다. 창작의 고통이란 말은 있어도 짜깁기의 고통이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짜깁기만으로 만들어진 책이 과연 창작물인가? 편집물 아니고?


창작에는 고통이 따른다. 작가는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뒤지고 취재를 하기도 하고 깊은 사유를 하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고, 기존의 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기반 정보도 충분히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고구마에는 사이다가 따르듯이, 고통에는 카타르시스가 따른다. 창작자가 고통스러운 만큼 작품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쾌감이 크다. 마라톤 선수는 오랜 고통 구간을 지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체험하는데, 이때가 일종의 카타르시스 구간이다. 창작자 역시 고통 구간을 지나 작품을 완성하면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그래서 창작을 한다.



허구의 세계에서 복수하기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소설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창작이 재미있어서일 수도 있고, 자기 안에 움츠리고 있는 감정을 분출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다. 나에게는 억눌린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분노에서 출발해 한이 되었고, 가끔씩 밖으로 튀어나와 일상을 좀먹는다. 한번 사로잡힌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피의 복수를 하기에는 내가 잃을 것이 너무 많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서 세상에 알렸다가는 각종 소송에 휘말릴 것이고, 신상이 털릴 것이고,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는 내 마음대로 악인에게 벌을 줄 수 있다. 악인을 고문할 수도 있고, 죽여버릴 수도 있고, 통쾌한 한 방을 먹일 수도 있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며 속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우리가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 나의 복수 대상을 집어넣음으로써 내 감정을 정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원한을 소설로 쓰려면 그 원한의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그 과정을 무사히 넘기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가 더 고통스러워졌다. 고통의 근원을 애써 바라보았더니 괴로워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글로 복수하려던 나의 계획은 처음부터 그렇게 어그러져버렸다.


그렇다고 글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좀 더 가벼운 이야기부터 쓰기로 했다. 소설 속 인물에게 감정 이입하되, 나에게 조금 덜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을 건드렸다. 그러자 인물들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조금씩 더 센 캐릭터를 불러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노트를 펼쳐 심판이 필요한 실제 인물들을 적어보았다. 마치 데스노트처럼. 이들을 허구의 세계로 던져 넣어 심판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는 처음에 느꼈던 그 괴로움에 굴복하지 않을 자신도 생겨나고 있다.



나쁜 놈은 왜 나쁜 놈이 되었나


소설의 3요소를 기억하는가? 인물, 사건, 배경. 특정한 배경에서 사건을 전개해나가는 역할은 인물이 한다. 그래서 인물 각각의 특징이 중요하다. 인물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역사가 다르다. 그렇기에 똑같이 주어진 상황에서도 각기 다른 행동을 한다.


어떤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벌일 행동을 결정하려면 그 인물의 역사와 배경을 살펴야 한다. 웹툰 <신과 함께>의 주인공 김자홍이 젊은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음했기 때문이고, 과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드라마 <구해줘 2>에서 주인공 김민철(엄태구)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그가 걸핏하면 폭력을 쓰기 때문이고, 폭력을 쓰는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와 존속 살인자인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회의 냉대 때문이다.


데스노트(라고 하자)에 미운 사람들의 이름을 써놓고, 각 인물들의 현재와 과거를 써 내려갔다. 놀랍게도, 그들의 역사와 배경에 내가 설득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데,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가련한지. 물론 가련하게 보자면 가련하고, 다르게 보자면 또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소설을 쓰면 미운 인간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역효과(?)가 생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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