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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Sep 19. 2023

이솝 우화: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

독후 단상

"굶주린 여우가 포도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포도 덩굴에 포도송이가 달린 것을 보고 따려 했으나 딸 수가 없었다. 여우는 그곳을 떠나며 중얼거렸다. '그 포도송이들은 아직 덜 익었어.'"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쉽게 포기하면서 변명이나 하면 안 된다는 교훈으로 모두 알고 있다. 나도 어린 시절엔 그렇게 새기고 지내왔다. 자라면서 내 선친께서 내게 즐겨 강조하셨던 말씀 한 마디가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거기에 더해 해석판으로 '해야 하고 하면 된다'라는 얘기도 자주 하셨다. 주로 대입을 앞둔 고등학교 시절에 집중포화를 당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집안 분위기로 인해 내 머릿속에는 위에서 언급한 여우는 비겁하고 치졸한 인상으로 남았다. 지나가다가 포도나무 밑에서 대충 훑어보고는 지레 짐작으로 포도송이를 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아무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며 변명이나 내뱉은 그런 존대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책을 펼치고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오해했던 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우는 포도나무를 타고 올라갔고, 어떡하든 포도송이를 따려고 시도했다는 사실 말이다.


내가 청년의 시기를 지날 때 베스트셀러 작가가 한 명 있었다. '지그 지글러'라는 사람이었는데 저서로는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책이 유명하다. 자기 계발과 동기 부여 분야에서 탁월한 언변과 필설로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훔쳤다. 나 역시 그의 책을 독파하며 성공으로 이르는 계단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노력했던 추억이 있다. 성공이란 노력하는 자에게만 허락된 달콤한 과즙의 포도송이였다. 변명과 핑계는 결국 실패한 자들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내뱉는 자기 합리화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이 들어 다시 책을 펼치고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강변할 수 있겠는가, 라는 자문을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말의 뜻은 고사하고 읽는 데도 힘에 부칠 것이며,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책 대신에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저, 웅진지식하우스 2018)가 더 눈에 꽂힐 것이다. 어쩌면 은둔형 외톨이로 자기 방에 처박혀 지내면서 '죽고 싶지만 떡복이는 먹고 싶어'라고 되내면서 말이다.


물론 아무리 요즘이 젊은이들에게 상실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나친 비약이다. 지금도 건강하게 자신의 꿈을 세우고 비전을 품고 밤낮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청년들이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한편에는 지금부터 2600년 전에 이솝이란 사람이 보았던 현실을 지금 나도 목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솝이 살았던 기원 전 6세기의 그리스는 엄격한 계급 사회였다. 노예가 실제로 존재했던 시대라는 말이고, 다름 아닌 이솝이 바로 노예 출신이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된 이후에, 아니 어쩌면 노예의 시절부터 태생에 따라 정해진 신분(계급) 제도가 한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실감하며 살았을 것이다. 포도나무에 오르기는 고사하고 포도밭에 들어가는 일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환경에서 그가 여우 이야기를 통하여 진심으로 바라고 원했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다른 노예들도 자기처럼 부단히 노력하고 행운을 얻어 자유인이 되는(포도를 따 먹게 되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것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나마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는 처세술을 설파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나는 솔직히 그의 생각을 읽어낼 재간은 없다. 다만 세상이 점점 합리적인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가설을 믿는다면, 이제 이천 년도 넘는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제는 예전처럼 포도밭만 바라보고 열망하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라 딸기밭도 있고 사과밭도 있고 하다못해 텃밭이라도 있어서 우리 아이들이 다양한 선택 속에서 작은 성공이라도 이루며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신분과 처지로 행복하게 지내기를 뜨겁게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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