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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열 Apr 03. 2024

걸어서 세계 속으로
: 고대에서 현대까지

  KBS의 세계여행 방송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무려 800회가 넘는 방영 횟수를 자랑하는 유명 프로그램이다. 누가 제목을 붙였는지 참 잘 지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제목을 여기서 잠시 빌려 쓰고자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 대우그룹 창업자 김우중 회장이 오래 전에 내놓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과 그 제목을 좋아하는데 몇 십 년 지난 지금에도 이만한 제목이 있을까 싶다.

  배움을 위해서 또는 호기심 때문에, 장사의 목적이든 여행의 목적이든, 인류는 오래 전부터 세계 곳곳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겨왔다. 얼마 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었다. 대개 그렇듯이 나도 학교 시절에 배워서 타이틀만 알거나 짧게 요약된 소개 글을 읽어본 정도였는데 이번에 전문을 읽어보니 분량도 길지 않고 내용도 재미있었다. 고전 명저를 읽을 때 책의 분량은 매우 중요한데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3000페이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4000페이지 분량이라서 도저히 전권을 읽어낼 수가 없다.

  [동방견문록]은 13세기 경 마르코 폴로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인도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접하게 된 문물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마르코 폴로는 길고도 험난한 이동경로를 거쳤고 특히 원나라가 된 몽골제국 5대 황제 쿠빌라이 칸의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본 아시아의 신기한 생활상과 사건들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보다 훨씬 오래 전인 7세기, 당나라 시대의 현장법사는 중국으로 보면 서역 즉 중앙아시아와 인도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원전의 불경을 모았고 이를 중국으로 가져와 번역을 함으로써 불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이 때의 여행기록을 남긴 것이 [대당서역기]이다. 현장은 무려 19년간의 여행을 하였고 돌아와서 또 19년간 불교경전을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8세기 들어 신라승 혜초는 현장법사의 뒤를 이어 불교의 뿌리를 찾아 인도지역을 여행하였고 [왕오천축국전] 정확히 말하면 왕 오천축국 전, 즉 다섯 개의 천축국(인도) 다녀온 이야기를 집필하였다. 흔히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부르는데 국방비만 천조원(약 1조 달러)을 넘게 쓰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 두 이름 간에 뭔가 공통점이 있으려나? 혜초는 중국을 거쳐 인도로, 그리고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대의 여행기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차마고도와 실크로드이다. 실크로드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무역로였던 차마고도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차와 티베트 주산물인 말을 맞바꾸기 위해 험난하기 그지없는 길을 말에 짐을 싣고 걸어서 이동한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2007년경 KBS 다큐로 방영되어 먹먹한 감동을 전해준 바 있는데 마방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인간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다.

  실크로드 즉 비단길은 동서간 실크 교역으로 생겨난 길이다. 중국 본토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기까지의 대장정이 이루어지는 무역로로서 여러 갈래의 길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를 통한 교역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오랜 기간 육로의 루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실크로드는 동서간 교역 뿐 아니라 사람과 문물의 왕래, 여러 지역에 걸친 문화의 전파 등 보다 거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차마고도와 실크로드, 편리한 교통수단도 없던 시기에 왜 이렇게 멀고도 험한 이동경로가 필요했고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것인가? 답은 생계, 즉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하면 교환(trade)의 이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각자 만들어서, 각자 쓰는 것보다 각자 만든 것을, 바꿔서 쓰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된다는 원리를 말한다. 이는 개인 단위, 마을 단위, 국가 단위 모두에 적용되는 보편성을 갖는다.

  고대로부터 있었던 여행, 교역 그리고 걷기의 역사는 현대에까지 이어진다. 둘레길, 올레와 같은 도보코스 이용객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고 산티아고 도보순례는 세계적인 유행인 동시에 버킷리스트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TV와 영화에 여행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수많은 여행과 걷기의 이야기 중에서도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저서 [나는 걷는다]는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사 기자로 은퇴한 저자는 60대의 나이에 새로운 인생항로에 도전하여 4년간 12000km를 걸어서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에 이르는 대장정을 완수하였다. 그냥 걸은 게 아니라 숱한 어려움을 겪어가며 하루하루 걷기를 지속했고 중간에 멈추었다가 다시 재개하여 마침내 계획했던 목표를 달성하였으니 인간승리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산티아고도 그렇고  [나는 걷는다]도 그렇고 왜 이렇게 걷기에 몰두하는 것일까?

  어설픈 해설은 안 하려고 한다. 그저 인간의 본능으로, 아니면 인생의 고단함 때문에,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시끄럽게 떠들어가며 걷는 경우도 있지만 혼자서 조용히 걷기에만 몰입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걸어서 세상 속으로, 걸어서 자신 속으로 향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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