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 Sep 27. 2023

여섯 장

유년 일기

 오만원권 여섯 장. 봉투에 넣으면 그리 두껍지 않은 액수. 나와 부모님 사이 정해진 생일 선물이다. 유난히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약속 장소로 향한다.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점심 자리다. 평소 같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섯 장만큼은 잊지 않고 챙긴다. 오만원권으로 미리 뽑아 봉투에 넣어 챙겨야 한다. 물론 아무 봉투는 안된다. 최소한의 성의랄까. 덕분에 방에는 색색깔의 용돈 봉투가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생일은 조금 다르다. 처음으로 백수가 된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냥 집을 나선다. 여차하면 계좌이체라도 하지 뭐.


 감정은 빠지고 의무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드라이한 선물은 나름의 협의를 통해 정해진 의무이다. 서로의 생일날뿐 아니라 대충 축하해야 하는 모든 자리에서 따르도록 제정된 기준점. 추석이나 설날, 크리스마스, 어버이날 등 축하가 필요한 자리는 최소 여섯 장을 기본으로 한다. 이 여섯 장은 자식 된 의무이자 최소한의 도리로 정해진 액수이므로 축하의 정도에 따라 자연스레 추가금이 붙기도 한다. 예를 들면 칠순이나 환갑이라면 평년과 동일한 여섯 장은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게 된다.


 여섯 장의 시작은 오빠의 결혼식 한 달 전쯤 아빠의 주최로 열린 가족회의였다. 이제 너희가 각자 자리를 잡고 성인이 되었으니 장성한 자식으로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의무에 관해 이야기 해주겠다는 요지였다. 너희가 가정을 이루거나 독립하게 되어 이 집을 나가게 되더라도 너희는 여전히 나의 자식이므로 이 연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일장 연설과 함께 두 개의 규칙이 통보되었다.


 첫째, 정기적인 용돈은 따로 필요 없다. 용돈을 따로 챙기지 않는 대신 추석이나 설날 등 의례적으로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날은 꼭 챙겨야 한다. 너희 둘 다 쓸데없이 선물 고민하지 말고 부담되지 않는 선인 삼십만원으로 액수를 정하도록 하자. 둘째, 한 달에 한 번씩은 날을 잡아 가족 식사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 충분히 합리적이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최소한의 도리’라고 느껴질 만큼. 그렇게 이 규칙은 오빠와 나에 의해 착실하게 지켜져 왔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이 규칙을 어겼다. 사실 모아둔 돈은 충분히 있었다. ‘자식의 최소한의 도리’인 여섯 장 정도는 빼서 준비할 수 있을 만큼. 단지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초점을 가장 낮은 기준점에 두고 강요할 때마다,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이거라도 정해두지 않으면 너희는 부모에게 최소한의 도리도 안할 놈들이야.’ 그게 싫었다. 뭘 그렇게 못하고 안챙겼다고 이렇게 믿음이 없나 싶어서. 근데 결국 나는 그 전제가 맞았다는 걸 몸소 증명해냈다. 뜨끔했다. 조금의 빌미만 있으면 언제든 이 의무를 벗어나고 싶은 철없는 마음이 툭하고 나와버린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마음이 내 기억 속 부모님과 너무 닮아 있어서.


 차라리 이럴 거면 최대 기준점을 정해놓는 게 어땠을까. 너희가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건 알지만, 부담되니까 절대로 백억 이상의 선물은 안 된단다. 뭐 이런 거. 너희 먹이고 키운 마음이 백억의 가치를 훌쩍 넘고, 너희가 부모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도 백억은 훌쩍 넘는다는 전제를 두고 말이다. 어렵겠지. 서로 그렇게 큰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절대 믿을 수 없을테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