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운대, 살구꽃이 아름다운 곳
3. 필운대, 살구꽃이 아름다운 곳
유본예(柳本藝)의『한경지략(漢京識畧)』에는 “필운대는 도성 안 인왕산 아래에 있다. 오성 이항복이 젊었을 때 필운대 아래 있는 도원수 권율 1537~1599)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자호를 서운(西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석벽에 새겨진 '필운대(弼雲臺)' 석 자는 이항복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 인가에서는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서 한양 사람들이 봄날에 꽃을 보러 다닐 때 반드시 이곳을 제일로 꼽았다.…하략… ”라 나온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도 거의 비슷한 이야기 나오는데, 필운이라는 이름은 필운산(弼雲山)에서 유래한 것이라 했다. 이곳은 살구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봄날을 즐기던 곳이었다.
꽃피울 나무 없는 황량한 성곽에는
저물녘 봄바람에 까마귀만 내려앉네.
옛 궁궐 가는 길엔 냉이가 파릇한데
봄 오니 늙은 농부 금비녀 줍는다네.
荒城無樹可花開 唯有東風落暮鴉
薺苨靑靑故宮路 春來耕叟得金叉
이호민(李好閔, 1553~1634), 「난리 뒤에 필운대에서 봄경치를 바라보다[亂後弼雲春望]」
전쟁의 재앙은 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병화(兵禍)가 휩쓸고 지나간 땅에는 나무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봄바람이 불어대지만 찾아오는 것이라곤 까마귀뿐이다. 그래도 궁궐로 통하는 길에는 냉이가 자라고 있어서 힘찬 생명력을 보여준다. 늙은 농부는 밭을 갈다가 금비녀를 줍는다. 정신없이 도망쳤던 궁녀의 것일까 여염집 아낙의 것일까. 전란의 상처는 땅속에 숨겨져 있다가 그렇게 예고 없이 속살을 드러냈다. 3,4구는 절망 속에 핀 희망을 말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노래하고 읊조리며 필운대 올라보니
흰 오얏꽃 붉은 복사꽃 나무마다 피어있네.
이러한 경치에다 이러한 즐거움으로
태평의 술잔에다 해마다 취하리라.
君歌我嘯上雲臺 李白桃紅萬樹開
如此風光如此樂 年年長醉太平盃
박문수(朴文秀), 「필운대(弼雲臺)」
1735년에 박문수가 참판 이보혁(李普爀)과 함께 필운대에 올라 사도세자의 탄생에 대한 기쁨과 기대를 담아 시를 지었다. 1795년 정조는 화성 장락당(長樂堂)에서 혜경궁의 회갑연을 베풀고 환궁하던 중에 필운대를 경유하면서, 박문수 당시의 일이 떠올리며 그의 시 운자를 따라 7언절구 한 수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운하게 하였다. 당시 화운한 사람들은 모두 55인으로 이 시를 모은 것이 「세심대갱재축(洗心臺賡載軸)」이다. 정조의 시는 『홍재전서』에 실려 있다.
박문수의 시는 심재(沈鋅)의 『송천필담(松泉筆譚)』에도 나오는데, 글자에는 약간의 출입이 있다. 사도세자의 탄생을 맞아 쓴 시는 축복이 가득하기만 하다. 좋은 날 좋은 경치에서 태평성세(太平聖歲)를 기원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사도세자의 운명은 이 시와는 정반대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해 저물어 갑자기 어두워지니
위는 밝고 아래는 고요해지네.
꽃 아래에 노니는 수많은 사람
옷과 수염 저마다 볼 만하구나.
斜陽倏斂魂 上明下幽靜
花下千萬人 衣鬚各自境
박지원(朴趾源), 「필운대에서 살구꽃 구경을 하며[弼雲臺看杏花]」
유득공은 『경도잡지』에서 한양의 명승지 다섯 군데 중 한 곳으로 필운대를 꼽았다. 김매순도 『열양세시기』에서 인왕산 세심대(洗心臺), 남산 잠두봉과 함께 한양의 3대 꽃놀이터로 들고 있다. 위의 시를 보면 해질녘까지 살구꽃 구경을 온 수많은 상춘객으로 가득했던 정황을 잘 볼 수 있다.
필운대는 배화여고 별관 뒤편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필운대 옆의 언덕은 육각현(六角峴) 또는 육각봉(六角峰)이라 하는데, 여기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지금 배화여대 자리이다. 유득공의 맏아들 유본학(柳本學)은「육각봉에서 노닐다[游六角峰記]」에서 “서대문 성곽으로부터 육각봉까지는 한양에서 꽃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인데 이제야 모조리 찾아가 보았다. 그렇다면 두루 봄놀이를 하기로는 또 올해만한 해가 없는게 아닌가![夫自白門之郭, 至六角峰, 京城看花之勝也, 而今盡訪焉. 然則春遊之遍, 又莫如今年矣.]”라고 나온다. 이날 여러 명의 친구들이 함께 놀았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한대연(韓大淵)이다. 자신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친구는 시험에 떨어져 있었다. 이 나들이가 큰 위로가 되었는지 최악의 처지였지만 최고의 봄나들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필운대는 양반들만 누리던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중인들이 유상(遊賞)과 시회(詩會)를 열고 신분상의 울분을 글로다 풀어 냈다. 그래서 그들의 시가(詩歌)를 두고 필운대조(弼雲臺調)라 칭했다고 한다. 심노숭의 기록에 보인다. 『한경지략(漢京識畧)』에는 거기서 불렸던 시들을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이라 했다는 기록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유명한 박효관도 여기에다 운애산방(雲崖山房)을 마련해 노래 부르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필운대는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고등학교 뒤편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