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보는 한양’ 4

-관악산(冠岳山), 화기(火氣)가 강한 산

by 박동욱


관악산은 서울의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과천현(果川縣)에 속하였으며, 금양(衿陽) 방면에 있는 삼성산(三聖山), 호암산(虎巖山, 虎壓山이라고도 한다)도 관악산의 일부로 간주된다. 일찍이 원효(元曉), 의상(義湘) 등의 고승들이 일막(一幕), 이막(二幕), 삼막(三幕) 등의 암자를 짓고 이 산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이 세 암자 중 삼막에는 677년(문무왕 17)에 원효가 삼막사(三幕寺)를 창건하였고,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외에도 호암사(虎巖寺), 망월사(望月寺), 염불암(念佛庵), 성주암(聖主庵), 연주암(戀主菴) 등의 암사(庵寺)가 있다.

관악산은 교가(校歌)에 단골로 등장하는 산이다. 서울 영등포 권역(구로동부, 영등포, 관악, 금천, 동작)과 경기 광명, 안양, 과천 지역에 있는 초중고교들의 교가(校歌)에 공통적으로 “관악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 연세대의 교가에도 관악산이 등장하니, 관악산은 서울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의 규모도 위압적이지 않고 거리도 가까워 1년에 무려 700만 명이나 찾는다. 특히 봄이면 철쭉이 흐드러지게 펴서 철쭉제가 유명하다.

관악산은 풍수상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에 해당하기 때문에, 화기(火氣)가 강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화기를 누르는 압승책(壓勝策)으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숭례문 바깥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관악산 옆에 있는 삼성산에도 연못을 두고 관악산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었다. 그러나 관악산의 화기가 더 강했는지 끝내 숭례문은 불에 타고 말았다.

산 정상인 영주대(靈珠臺)는 세조 등이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인데, 조선 후기에도 관악산에 제사를 지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또, 관악산 도적 떼가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관악산은 도봉산이나 삼각산과 비교해 유람을 즐겨 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유기(遊記)나, 시문(詩文)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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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2월 아무 날에 삼각산에서 방향을 돌려 관악산(冠岳山)에 들어갔다. 관동(冠童) 두서너 명과 함께 동강(東岡)을 넘어서 불성암(佛成菴)에 이르러 노승(老僧)과 이야기하였는데,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관악산은 영주대(靈珠臺)가 실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勝景)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습니다. 그다음 가는 것은 자하동(紫霞洞)인데, 자하동이라고 이름 붙인 동이 네 군데 있습니다. 불성암에서 남쪽 아래에 있는 것을 남자하(南紫霞)라고 하고, 남쪽에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들어간 것을 서자하(西紫霞)라고 하는데, 모두 특별히 칭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영주대 북쪽에 있는 북자하(北紫霞)는 자못 맑고 깨끗하지만 그래도 동자하(東紫霞)의 기이한 경관만은 못하니 거기에는 못도 있고 폭포도 있어서 영주대의 다음이 됩니다. 그 외에도 절이나 봉우리 등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곧 저물녘에 서암(西巖)에 올라 일몰(日沒)을 보고 그대로 암자에서 잤다. …하략… 이익(李瀷),「관악산 유람기[遊冠岳山記]」


영주대(靈珠臺)는 연주대(戀主臺), 염주대(念主臺) 등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이 전한다. 이곳에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좌선했다고 한다. 다른 이름인 연주대는 고려의 유신들이 여기에 올라 개성(開城)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이후 효령대군이 수행했고, 세조가 기도했던 곳이라 한다. 연주암에는 아직도 효령대군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이익은 29살이던 1710년 봄에 관악산을 등정하고 유기를 남겼다. 이 글을 보면 관악산의 전체적인 승경(勝景)을 그려볼 수 있다. 관악산의 정상은 영주대이고 이를 중심으로 자하동(紫霞洞)이 펼쳐져 있었다. 남자하(南紫霞)는 안양(安養) 쪽 경계에 해당하며, 서자하(西紫霞)는 삼성산(三聖山)의 삼막사(三幕寺) 일대, 북자하(北紫霞)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일대이다. 산승이 자하동(紫霞洞) 중에 으뜸으로 친 동자하(東紫霞)는 과천(果川) 일대를 말한다. 신위(申緯)의 호도 자하(紫霞)인데 자하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가 살았던 자하동(紫霞洞)과 서울대에 있는 자하연(紫霞淵)도 마찬가지다. 영주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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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에는 평평한 돌이 깔려 있어 수십 명이 앉을 수가 있었다. 그 이름은 차일암(遮日巖)으로 옛날 양령대군이 동궁 자리를 피하고 관악산에 왔을 때, 자주 이곳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던 곳이다. 해가 뜨거워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작은 장막을 펴고 앉았다. 바위 귀퉁이에 구멍을 파서 요(凹)의 모양을 한 것이 넷이 있는데, 대개 장막 기둥을 매었던 것이다. 구멍은 지금도 완연하다. 대를 연주(戀主)라 하고, 바위를 차일(遮日)이라 한 것이 이 때문이다. 채제공, 「관악산을 노닐다[遊冠岳山記]」


채제공의 유기에는 영주대 정상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양녕대군이 왕위를 아우 충녕대군에 물려주고 관악산에 머물렀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한 자취가 그것이다. 권력을 한사코 마다한 충녕대군이 햇살을 피했다는 전설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서울 쪽 하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포기한 권력을 아쉬워했을까? 동생을 선치(善治)의 기원했을까?


바위 벼랑 부여잡고 가파른 봉우리 올라

높고 높은 이 영주대에 올라왔네.

생각건대 여기서 하늘이 멀지 않으리

우러러보니 머리 위에 삼태성이 있으니

攀巖捫壁陟崔嵬 來上靈珠上上臺

想得去天應不遠 仰看頭上有三台

이응희(李應禧), 「관악산 영주대에 올라[上冠岳山靈珠䑓]」


관악산 정상까지는 노약자에게 그리 만만한 코스가 아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2014년~2016년 동안 관악산에서 633건의 사고가 발생했다고 나온다. 이응희는 바위와 벼랑을 잡아가며 정상에 올라왔다. 올라와 보니 머리 위에 삼태성이 있는 걸 보니 하늘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덧없는 세월 가을 깊어 가는데

쓸쓸하게 올해도 함께 저무네.

올라서는 원기만 느끼면 되지

서울이 어디인지 따져 무엇하리

牢落秋將晩 蕭疎歲共遒

登臨但一氣 不復辨皇州

윤휴(尹鑴), 「관악산에서 가을에 바라보다[冠岳秋望]」


가을이 되면 한 해가 끝자락에 서 있게 된다. 정상에서 느끼는 쇠락한 계절의 감회란 결국 성취감과 허망함을 각성케 한다. 서울 쪽을 향해 기웃대지 않으리란 결심을 해본다. 권력과 욕망을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그저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본다.




연행록에서는 송골산(松鶻山)을 자주 관악산과 비교했다. 이덕무의 「입연기」에는 “도중에서 북으로 송골산(松鶻山)을 바라보니 솟은 봉우리가 불꽃 같아 흡사 우리나라의 관악산(冠岳山)과 같았다. 그러나 빼어나고 윤택하기는 이 산이 더한 것 같다.”라 나온다. 이렇게 관악산은 흔히 연상되는 산이었다.

그러나 관악산은 긍정적인 함의보다는 부정적인 함의가 더 컸다. 이러한 평가에는 관악산의 화기가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악산 근처나 관악산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서 자란 규수와는 혼인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관악산을 마주했기 때문에 여자가 불같은 성미를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악산에 대한 기록은 남인(南人)들이 많이 남겼다. 출사(出仕)의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이 관악산에 올라 서울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관악산은 끝내 버릴 수 없는 욕망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하는 쓸쓸한 공간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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