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계(淸風溪), 옛 집 그렇게 기억되다
청풍계(淸風溪), 옛 집 그렇게 기억되다
청풍계는 현재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청풍계는 청풍계(淸楓溪), 청풍계(靑楓溪), 청풍계(淸風溪)로 적히고 풍계(楓溪)라고도 일컬어졌다. 유본예의『한경지략』에는 “청풍계가 장의동(壯義洞)에 있으며 선원 김상용의 옛 집이 있다.(清風溪在此洞, 有金仙源尙容舊宅.)”라 나온다.
…전략… 이 집은 정축년 강화(江華) 난리에 절사(節死)한 선원 김상용(1561~1637)씨의 구택입니다. 이 집이야 명물에 빠질 수 있습니까? 농암의 ‘청풍노수금상재(淸風老嫂今尙在)’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농암이 이 집에 오면 과거(寡居)하는 노인 수씨(嫂氏)가 술을 내보내 드립니다. 혈혈(孑孑)한 부인 한 분이라도 이 집을 지키어 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던 것을 보면 고금의 느낌이 자연히 일어납니다.
이 집이 지금은 일본 사람의 집이랍니다. 태황제(太皇帝), 고종 계실 때 이 집이 궁중 소속이 되게 된 것을 특별히 도로 내어 주셨지요. 그 뒤 일이야 말할 것 있습니까? 맑은 바람 맑은 물까지도 고금이 달랐으며 오히려 우리의 느낌이 덜할 것 같습니다[청운동 2번지 박봉대朴鳳大)] -경성백승(京城百勝)-
농암 김창협의 이야기는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기록에 따르면 청풍계의 소유자가 일본 사람에 넘어간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일평은『근교산악사화』에서 일제 때 미쓰비시사의 소유가 되었고, 태고정도 한 칸만 남은 채 인부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나라를 위해 순절한 김상용의 옛 집은 나라를 빼앗겨 일본 사람의 소유로 전락해 버렸으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울창한 숲 짙은 그늘 고요만한데
텅 빈 정자 삿자리 시원도 하네.
샘물은 섬돌 밑에서 옥소리 내고
연꽃은 베갯머리에 향기 보내네.
손은 게을러 시집 던져 버렸고
정신은 흐려서 낮잠에 빠지네.
이런 산중에서의 한적한 맛이
이때에 깊은 줄을 퍼뜩 깨닫네.
樹密濃陰靜 亭虛小簟涼
泉鳴階下玦 荷送枕邊香
手懶抛詩卷 神昏入睡鄕
山中閑意味 偏覺此時長
김상용(金尙容), 「태고정에서. 신해년(1611)에 짓다(太古亭卽事 辛亥年作)
청풍계는 원래 김상용의 부친인 김극효(金克孝, 1542∼1618)에 이르러 명성을 얻게 되었다. 김극효가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사위이자 제자로 학행과 처가의 배경을 바탕으로 당대의 명사로 부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위의 시는 김상용이 청풍계에 있는 정자인 태고정에 대해 쓴 것이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에는 “태고정은 선원 김상용의 사우(祠宇)로서 ‘늠연당’이라는 편액이 있다. 냇물 위에도 석각이 있는데, ‘대명일월백세청풍(大明日月百世淸風)’ 여덟 자가 있었으니, ㅁㅁㅁㅁ의 글씨이다.”라 나온다. 여기 나오는 늠연당은 1708년에 건립한 김상용의 사당 늠연사를 이른다. 여기 보이지 않는 글씨는 판본에 따라 다른데, 서울역사박물관본은 “계곡 가에 또한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대명일월은 송시열의 글씨이다. 또한 백세청풍이 새겨져 있는데 즉 명나라 사진 주지번의 글씨이다.(溪上又有石刻, 曰大明日月, 宋尤菴筆也. 百世淸風, 卽明使朱之蕃筆也.)”라 나온다. 현재 청운초등학교 오른쪽 주택가의 시멘트 벽 아래 백세청풍 각자 암벽이 있는데 대명일월 각자는 일제시기에 없어졌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정자에는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샘물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연꽃에서는 쉴 새 없이 향기가 풍겨 온다. 시집을 읽다가 그것도 내팽겨 치고 잠에 빠진다. 그야말로 한가한 시간들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인왕산을 떠올려보면
마치 태고정 오르는 것 같네.
비가 개면 시내는 점점 하얘지고
구름 걷히면 산은 늘 푸르렀었지.
새 우니 노래인지 의심이 됐고
꽃 아롱지니 수놓은 병풍 같았네.
신선 응당 이곳에 있을 것이니,
구태여 황정경을 읽을 것인가?
每憶仁王洞 如登太古亭
雨晴溪漸白 雲捲嶽恒靑
鳥哢疑歌曲 花斑若彩屏
神仙應在此 何必讀黃庭
유근(柳根), 「청풍계에 쓰다[題淸風溪]」
김상용의 별업이 완성되자 이항복, 유근, 심희수 등이 청풍계에 자주 모여 시회를 열었다. 그곳은 이랬다. 시내와 산이 자리 잡고 있었고, 거기에서 새는 노래하고 꽃은 만발했다. 마치 이곳은 신선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아서 도교 경전인『황정경(黃庭經)』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김상용의 친구들에게 청풍계는 그렇게 기억됐다.
칠 척 몸은 한 조각 연기 따라 사라졌으니
남기신 옷조차도 비린내로 더럽혀지지 않았네.
세상에선 초혼할 곳이 있지는 않지만
만고의 하늘 위에 해와 달처럼 걸려있네.
七尺身隨一片煙 遺衣亦不汚腥膻
人間未有招魂地 萬古雲霄日月懸
이경석(李景奭), 「청풍계에서 김승상을 추억하며 감회에 젖어서(靑楓溪 憶金丞相有感)」
1637년 강화도에서 김상용이 폭사하여 순절한 뒤로, 청풍계는 김상용의 충절을 기리는 곳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되었다. 이경석은 김상용의 충절을 해와 달에 빗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충절을 기리었다.
아! 우리 풍계에 있는 집이
무너진 지가 무릇 몇 해나 됐나?
못과 누대에는 풀이 무성히 자랐고,
단풍나무와 잣나무는 꺾여 땔감 되었네.
누각은 화려한 색깔 바래어져서
비바람만 쉴 새 없이 불어오누나.
북쪽 정원 아래에서 안절부절하다
서쪽의 냇가에서 서글퍼하네.
삼년동안 마음에만 담아 두었다
칠월에야 이 역사를 벌이게 됐네.
문득 높이 집을 지어 올리니
서까래는 날개를 펼칠 듯하네.
샘의 원천에서 맑은 소리 솟구치니
멀리 세 못으로 물을 끌어 들였네.
천천히 거닐면서 선대 우러르니
그분 남기신 자취 좇는 듯하네.
嗟我楓溪宅 頹廢凡幾春
池臺生茂草 楓栢摧爲薪
阿閣損華彩 風雨颯昏晨
屛營北園下 感慨西澗濱
三年積我慮 七月延斯役
崇構歘已抗 翼翼榱與桷
源泉激幽響 遠通三池曲
遲徊仰先代 彷彿追遺躅
김시보(金時保), 「옛 집을 수리하며 감회가 있어서[修治舊宅有感]」
김상용이 세상을 떠난 뒤로 청풍계는 한동안 주인도 없이 비어 있었다. 그 뒤 1682년 김시보가 청풍계를 수리하게 된다. 위의 시는 이때의 감회를 적은 것이다. 연꽃과 누대는 풀이 웃자라 있었고, 단풍나무와 잣나무는 땔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단청이 화려했던 누대는 제 빛을 잃어버린 채 비바람에 몸을 내주고 말았다. 3년 동안 고치겠다 마음만 먹다가 이제야 수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무너진 건물을 보수하고 못의 물도 채워 넣었다.
청풍계는 그 뒤로도 꾸준히 소환되었다. 18세기 들어서도 이병연, 성대중, 이덕무, 이서구, 신위 등이 시를 남겼다. 청풍계는 뛰어난 경치를 간직하여 명사(名士)들이 모여 들었던 공간으로의 의미만 갖지는 않는다. 이곳은 조선후기 시단에 새로운 기풍을 일으켰던 진시운동(眞詩運動)의 한 출발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