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명시(絶命詩)-
네가 이 날 이 일을 전하여 다오
汝早寄吾家 네가 진작 내 집에 몸을 맡겨서
相視猶父子 서로 보길 부자와 같이 하였네.
半生共休戚 반평생을 기쁨, 걱정 함께 했으니,
永言保恩義 은의를 보존했다 늘 말할 만하네.
隨我入栫棘 날 따라 가시 울 적소(謫所)에 드니
嶺海渺千里 아득한 천 리 밖에 유배지였네.
有子不相隨 자식 있어도 나를 못 따라오니
非汝誰復倚 너 아니라면 다시 누굴 의지했으랴.
那知被逮路 어찌 알았으리. 잡혀 가는 길에서
忽聞賜我死 사약 내려 죽는 소식 갑자기 들을 줄을
見爾號且泣 울부짖고 울어대는 너를 보자니,
自然傷我意 자연스레 내 마음 아프게 되네.
收骨是爾責 내 뼈를 거두는 건 네 책임이니,
勉爾且收淚 너는 힘써 눈물을 거두어다오.
吾兒出圓扉 내 아들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若爲傳此事 네가 이 날 이 일을 전하여 다오.
김창집(金昌集), <임종할 때에 이 시를 써서 이명룡에서 주다 29일이다[臨命 書贈李命龍 二十九日] >
[평설]
김창집은 노론사대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다. 정치적인 여러 부침 끝에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1721년 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 뒤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우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소론에 의해 탄핵되어 거제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722년 목호룡(睦虎龍, 1684∼1724)의 무고로 김창집은 성주(星州)로 이배(移配)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이명룡(李命龍)은 김창집의 아내 쪽의 지친(至親)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명룡은 김창집에게 양육되었으니 자식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유배지에 있다는 특별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죽음에 임해서 마지막 당부를 남길 정도로 각별한 사이임에는 틀림없었다. 절명시의 경우 대개의 수신자는 가족이나 제자 등 가까운 관계의 인물들이었다.
멀고 아득한 유배지에서 자신을 따랐던 일에 대한 감사함을 담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너무 상심말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자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아들인 김제겸이 해배(解配)되면 아비의 마지막 순간을 잘 전해줄 것도 부탁하였다.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金濟謙, 1680-1722)은 울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배된 부녕(富寧)에서 사사되었다. 끝내 김창집의 마지막 모습은 아들에게 전해질 수 없었다.